손목 나가게 묵직한… 내 부엌의 동반자

김은경 기자 2023. 4.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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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무쇠·철·스테인리스
‘반려 프라이팬’의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제 막 파리에 온 미국인 에밀리에게 이웃집 셰프 가브리엘이 오믈렛을 요리해준다. “평생 먹은 오믈렛 중에 최고”라며 맛있게 먹은 에밀리가 뒷정리를 하려고 프라이팬과 주방 세제를 집어드는 순간, 가브리엘이 막아선다.

요리는 역시 ‘장비발’인가.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요리사 가브리엘(오른쪽)이 에밀리에게 무쇠 주물 프라이팬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넷플릭스

“안 돼요. 그러면 프라이팬이 망가져요.”(가브리엘)

“이거 세제인데요.”(에밀리)

“설거지하지 않고, 기름을 먹이는 거예요. 그게 오믈렛 맛의 비결이죠.” (가브리엘)

김규원(32)씨는 이 장면을 보고 지난 1월 철 프라이팬을 들였다. 설거지를 안 하는 프라이팬이라니. 호기심에 찾아봤더니 드라마에 나온 팬은 옛날 가마솥처럼 무쇠로 만든 팬이었다. ‘논스틱(눌어붙지 않는) 코팅’이 돼 있지 않아 세제 대신 기름으로 닦아내면서 쓴다고 했다. 처음에는 위생이 걱정됐지만, 한 번 사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기에 무쇠와 비슷하지만 약간 더 가벼운 철 팬을 하나 장만했다. 김씨는 “전에 쓰던 일반 프라이팬보다 뜨겁게 달궈져 고기나 채소를 구울 때 맛과 식감을 더 살려준다”며 “철 팬은 쓰면 쓸수록 음식이 맛있게 되고 평생 쓸 수 있다고 해 ‘반려 프라이팬’으로 삼기로 했다”고 말했다.

◇소모품에서 반려품 된 프라이팬

1954년 ‘테팔’이란 회사에서 음식이 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이 나왔다. 기존의 알루미늄 프라이팬에다 열에 강하고 부식되지 않는 테플론(Teflon)이라는 합성수지를 입힌 형태였다. 식용유를 조금만 둘러도 음식이 눌어붙지 않아 출시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업계에 따르면 지금도 시중 프라이팬의 80% 이상은 코팅 제품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다시 무(無)코팅 팬으로 돌아가는 복고 열풍이 분다. 가마솥처럼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든 주물 팬, 강철 판을 강하게 누르거나 두들겨서 만든 철 팬, 스테인리스 팬 등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건강과 환경에 신경 쓰는 소비 흐름 때문이다. 김민경 한양대 화학과 교수는 “코팅이 벗겨지면 음식을 눌어붙지 않게 하는 본연의 기능을 못 하게 되고, 프라이팬 본체를 이루는 알루미늄 등 금속이 녹아 나와 인체에 쌓이게 되면 뇌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코팅 팬은 가볍고 편리하지만 내부 금속 색깔이 보이기 시작하면 바로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코팅 안 된 팬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최근 6개월 된 아들이 이유식을 시작한 김모(33)씨 주방엔 코팅 프라이팬이 하나도 없다. 그동안 쓰던 프라이팬 코팅이 벗겨져 버릴 때마다 하나씩 스테인리스나 주물 팬을 사들였다. 김씨는 “화학 물질인 코팅이 긁혀 나올까 걱정도 되고, 1~2년마다 버려야 해 환경에 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한 번 사서 평생 쓸 수 있는 팬들로 바꿨다”고 했다.

스테인리스나 무쇠 재질은 알루미늄보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한번 열을 받으면 잘 식지 않아 끝까지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런 이유로 무코팅 프라이팬 마니아층이 두꺼워지고 있다. 네이버 카페 ‘스텐팬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18만6000여 명이, 주물·철팬 사용기를 공유하는 ‘단순무쇠의 공간’에는 1만여 명이 가입돼 있다.

이 트렌드는 코로나 유행과 물가 급등이 불러 온 ‘집밥 열풍’과도 무관하지 않다. 정모(34)씨는 “집에서 요리할 때 조리법을 참고하는 인플루언서들의 조리 도구를 따라 사다 보니 찬장에 무쇠나 스테인리스 프라이팬이 늘었다”고 했다.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디자인은 덤. 유명 식당 음식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먹스타그램(맛집 인증 사진)’이 코로나를 계기로 ‘집밥스타그램(집밥 인증 사진)’으로 확대되면서, 특유의 투박한 멋이 있는 무쇠·철 팬이나 세련된 스테인리스 팬을 식탁에 그대로 내어 먹는 모습을 찍어 올리는 것이 유행이 됐다.

◇길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더 좋다

무코팅 프라이팬은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뚜렷하다. 대체로 무겁다. 코팅 팬은 600g~1㎏ 정도인데 무코팅 팬은 2~3㎏은 족히 나간다. 관리도 까다롭다. 주물이나 철팬은 사용 전 음식이 눌어붙지 않게 겉 표면에 기름막을 씌우는 ‘시즈닝(seasoning)’도 해줘야 한다. 프라이팬에 얇게 기름을 발라 가스레인지나 오븐으로 굽고 식히기를 반복해 천연 코팅을 하는 것이다. 또 사용하고 물로 세척한 다음에는 곧바로 다시 불에 올려 물기를 날리는 것도 필수다. 안 그러면 녹이 슨다.

스테인리스 팬은 녹 걱정이 없지만 예열을 제대로 안 하면 음식물이 눌어붙거나 타버리기 십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스테인리스 팬에 능숙하게 계란말이를 부치는 모습이 화제가 됐는데, 당시 주부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스텐 팬에 계란말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뜻밖이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달걀 스무 개 정도는 버리고 나서야 손에 익는다는 게 고수들의 전언이다.

프라이팬을 반려로 삼는 사람들은 이런 수고로움이 그 매력을 더한다고 입을 모은다. 쉽게 곁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요리가 성공했을 때 더 뿌듯하고, 최적의 예열 시간과 관리 방법 등 내 손에 맞춰가는 맛이 있다는 것이다. 관리가 서툴러 혹여나 녹이 생기거나 심하게 타더라도, 코팅 벗겨질 걱정 없이 철수세미로 박박 긁어내 다시 쓰면 된다는 점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도 많다. 숱한 실패를 함께하며 묵직한 정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반려의 진면목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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