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블라인드 채용의 한계

기자 2023. 4. 15.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블라인드 채용은 능력주의에 충실한 선발 방식이다. 지원자가 어느 대학 출신인지를 가리고,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선발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마디로 ‘스펙’보다 ‘능력’을, ‘집단’보다 ‘개인’을 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위증이나 성적표는 물론이요, 자기소개서나 면접 등에서도 어느 대학 출신인지를 가려야 하며, 만일 이를 드러내면 탈락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하반기 공공기관에 도입되었고 2018년 가이드라인이 확립되었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그렇다면 과거에는 왜 스펙이 그렇게 중요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정기채용 혹은 공채라고 불려온 채용방식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정기채용이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공개적·집단적으로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제도다. 기업이 굳이 1년에 한두 번 신입사원을 몰아서 뽑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게다가 뽑을 당시에는 이 사람이 나중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몇 개월 교육을 거친 뒤 부서로 배치되는데, 본인의 전공이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직무가 주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정기채용을 광범위하게 받아들인 나라는 전 세계에 일본과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에는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정착했고, 한국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도입됐다. 이것은 정기채용이 일본과 한국 특유의 ‘종신 고용’과 맞물린 제도임을 시사한다. 장기간에 걸쳐 데리고 있으면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는 식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두루 잘하는 팔방미인이 필요하다. 자연히 ‘스펙’, 즉 깊이 있는 전문성이 아니라 팔방미인적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들을 요구했다. 어학시험, 자격증, 공모전, 학점 등. 특히 출신 대학을 통해 팔방미인적 능력을 가늠하기 쉬웠으므로, 출신 대학이 중요한 스펙으로 꼽혔다.

일본은 이를 아직 지키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기업은 2010년대 들어 정기채용을 줄이면서 수시채용을 늘려왔고, 코로나19를 계기로 대부분의 주요 그룹이 100% 수시채용을 선언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비용 절감이다. 정기채용에 소요되는 교육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수시채용의 특징은 뽑을 때부터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고 선발한다는 점이다. 즉 맡길 직무(job)를 정해놓고 그 직무에 맞는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훈련 비용이 최소화된다. 자연히 팔방미인적 스펙보다 해당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느냐, 즉 직무 전문성이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만큼 채용 시 출신 대학의 중요성은 줄어든다.

블라인드 채용은 정기채용에서 수시채용으로, 스펙에서 전문성으로 변화하는 채용 트렌드를 더욱 급진화시키는 변속기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블라인드 채용이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의문이다. 공공기관들의 2016년과 2019년 채용 결과를 비교한 자료를 보면, SKY 출신은 8%에서 5.3%로 줄었고 비수도권대 출신은 43.7%에서 53.1%로 늘었다. 물론 의미있는 변화이겠으나, 이것은 ‘블라인드 채용’의 도입뿐만 아니라 ‘지역인재 채용’ 비율이 높아진 것도 동시에 반영된 결과임에 유의해야 한다. 이는 대입경쟁 및 대학교육을 거치면서 (후광효과를 배제한) 순수한 개인의 능력 또한 대학 서열에 따라 통계적으로 배열됨을 시사한다.

또 하나 블라인드 채용이 부딪히는 한계는 연구직의 경우다. 이공계가 인문사회계열에 비해 일찌감치 학벌 후광효과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논문’으로 대표되는 연구성과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교수나 연구원을 선발할 때 얼마나 영향력 있는 저널에 논문을 실었으며 논문의 피인용지수가 어느 정도인지 등이 핵심적인 기준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능력주의 선발이 정착됐다.

그런데 블라인드 채용은 이를 거꾸로 파괴하고 있다. 논문 제목을 알려주면 간단한 검색을 통해 지원자의 신원을 알 수 있고, 곧바로 출신 대학(원)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류심사 단계에서는 논문 제목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면접 단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인터넷이 단절된 노트북에 탑재된 논문 제목과 초록만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높이뛰기 선수를 선발하려다가 멀리뛰기 선수를 선발하는 일이 생긴다. 어떤 코치에게서 지도받았는지를 가리려면 지난 대회 성적도 가려야 하고, 결국 ‘도약력’이라는 보다 추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연구기관들이 블라인드 채용에 제기하는 불만을 ‘학벌주의에 물들어서’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블라인드 채용의 목적은 능력주의의 실현이고, 그 방법이 목적을 방해한다면 방법을 타파해야 한다.

이범|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