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4월15일과 4월16일

기자 2023. 4. 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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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6일. 사랑하는 이의 어머니이자 나의 시어머니가 별세했다. 장례 기간 내내 물색없이 딸기 생각이 났다. 최근 어머니 병세가 악화돼 음식을 거의 못 먹었는데 부드러운 딸기는 그나마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병원 갈 때마다 딸기를 사고 싶었다. 하지만 게을러 미루고 미루다 서둘러 찾아온 죽음에 어머니와 함께 딸기 먹을 기회를 빼앗겼다. 내가 딸기 못 산 걸 후회하듯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후회를 남긴다. 그의 빈자리를 통해, 이젠 함께할 수 없는 텅 빈 시간을 통해, 그가 생전에 좋아했거나 싫어했던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후회한다. 그 후회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돼 꽤 오래 집요하게 우리 마음에 부활할 것이다. 물론 어머니의 죽음이 후회와 상처로만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불의의 사고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쓴 회고록에 이렇게 심경을 고백한다. “세상의 상처를 향한 동정심으로 우리의 고민이 커지지 않는다면, 주변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확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통찰력이 깊어지지 않는다면, 중요한 일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 굳건해지지 않는다면, 소망이 약해지고 믿음이 사라진다면, 죽음의 경험을 통해 무언가 선한 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죽음이 우리를 이긴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여, 자랑하라.”

어머니를 잃고 위안을 얻기 위해 책을 펼쳤다가 이 문장을 읽으며 세월호와 이태원에서 희생된 이들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4월에 잃어서인지, 어머니를 모신 납골당 옆에 세월호 추모관이 있어서인지, 어머니가 메던 가방에 세월호 리본이 달려 있어서였는지 어머니의 죽음에 그들의 죽음이 포개어졌다. 어머니와 짧은 시간 함께한 나도 이렇게 슬펐고, 슬프고, 슬플 것인데 바다 한가운데서, 거리 한복판에서 갑자기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그 슬픔과 고통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부정당해야 하는 이들의 심정은 어떨까? 어리석은 나는 어머니를 잃고서야 비로소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헤아려본다.

우리는 사회적 참사에 희생된 이들을 가리켜 ‘별이 되었다’고 표현하곤 하지만, 정말 그렇기만 할까? 그들은 ‘별’이 되어 우리를 완전히 떠난 게 아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집요한 후회로, 공동의 상처로, 누군가 뱉은 혐오의 언어 속에, 2900만원의 변상금으로, 그리고 생존자의 얼굴로 날마다 기억되고 되살아난다.

내일이면 세월호 참사 9주기다. 2023년 4월16일은 2014년 그날과 무엇이 다를까? 2022년 10월29일이라는 또 한 번의 참사가 추가되었을 뿐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인간의 역사를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BC와 AD로 나눈다면, 한국 사회는 4월15일과 4월16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사회적 시간이 ‘4월16일’에 멈춰 있거나 여전히 그 시간을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 멈춘 시간을 흐르게 해 4월16일, 10월29일과 같은 참사의 목록을 늘리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후회와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다른 이의 경험을 헤아리는 마음으로 확장되고 연결되게 하기 위해 그 죽음들을 우리 일상에 매일 부활시키는 수밖에 없다. ‘죽음’이 우리를 이기지 못하도록. 나는 기억과 연대의 힘을 믿는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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