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연금개혁법, 6개 조항 제외 ‘합헌’…64세로 정년 연장법 즉시 공포
연금 수령을 위한 일반 근로자의 법정 은퇴 연령(정년)을 현행 62세에서 64세로 2년 연장하는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안이 14일(현지시각) 프랑스 헌법위원회로부터 사실상 ‘합헌’ 판단을 받았다. 전체 법안 중 55세 이상 고령 근로자의 고용을 확대하기 위한 조항들이 위헌 판단을 받아 ‘부분 위헌’ 결정이 내려졌지만, 논란의 중심이 된 정년 연장과 헌법 49조 3항을 이용해 의회 표결을 건너뛴 것 등이 모두 합헌 판단을 받았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밤 문제가 된 조항을 제외한 연금 개혁법을 전격 공포했다. 노동 단체와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프랑스 헌법위원회는 이날 오후 6시 “지난달 21일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가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제출한 연금 개혁 법안을 심층 검토한 결과, 6개 항목에 대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단, 부분 위헌(la censure partielle)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위헌 판단을 받은 내용은 정년 연장을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고령자의 무기 계약직(CDI) 고용을 의무화하는 규정과, 이를 감시하기 위해 해당 기업의 전체 고용 중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공개토록 하는 규정 등이다. 헌법위원회는 “이 조항들은 (관련 법률에 대한) 기존 입법 체계와 조화되지 않는 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는 그러나 “(정년 연장 등) 법안의 다른 부분과 관련해, 헌법에 위배되는 점은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연금 개혁 반대파는 정부가 연금 개혁을 위해 사회보장재정법(PLFRSS)을 수정하는 것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헌법위원회는 또 좌파 연합 뉘프(NUPES)가 제출한 연금 개혁법에 대한 국민 투표 요청도 반려했다. 만약 국민 투표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연금 개혁법의 입법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았다. 국민투표 발의를 위해 최소 470만명의 서명을 받는 절차가 9개월간 이뤄지고, 그 이후에서 각각 하원과 상원에서 국민투표 법안에 대한 검토가 이뤄진다. 이 경우 연금 개혁법 시행이 1년 이상 늦춰지면서 사실상 좌초될 공산이 컸다.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이 제출한 국민투표 요청에 대한 판단은 5월 3일에 발표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역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헌법위원회 발표 직후 “헌법위원회 결정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엘리자베트 보른 총리는 “오늘 밤, (헌법위원회의 결정에 있어) 승자도 패자도 없다”며 연금 개혁법 입법 절차를 마무리 할 것임을 밝혔다. 헌법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한 법률은 대통령에 의해 15일 내에 공포될 수 있다. 그러나 위헌 결정을 받은 부분은 제외해야 한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밤 즉각 법률 공포에 나섰다. 프랑스 대통령궁(엘리제궁)은 15일 새벽 “마크롱 대통령이 (위헌 판단을 받은 6개 조항을 제외한) 연금 개혁법 공포에 서명했다”며 “곧 관보에 게재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야당과 노동 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노동단체들의 반대 집회를 이끌어온 노동총동맹(CGT)측은 “헌법위원회가 (정부측에) 편향적인 판단을 했다”며 “연금 개혁 철폐를 위한 저항의 강도를 높여가겠다”고 밝혔다. 연금 개혁법이 공포되더라도,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벌여나가겠다는 것이다. 야당인 극좌 성향 굴복하지않은프랑스(LFI)와 극우 성향 국민연합(RN) 역시 “헌법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며 “연금 개혁을 막기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반면 야당이지만 연금 개혁에 우호적 입장을 보여온 공화당(LR)은 “모든 정치 세력이 헌법 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밤 파리 시청과 헌법 위원회가 있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인근에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노조원과 시민 수천명이 몰려들어 기습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 경찰은 헌법위원회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13일 오후 6시부터 15일 오전까지 이곳 인근의 시위를 금지한 상태다. 경찰이 시위대 해산에 나서자 일부 시위대가 돌과 쓰레기를 던지며 저항했다. 앞서 13일 프랑스 곳곳에서 제12차 연금 개혁 반대 시위가 벌어져 내무부 집계 38만명, 노조측 집계 100만명이 참석했다. “연금 개혁법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헌법위원회 인근에 쓰레기통을 쌓아두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 언론에선 “정부의 치밀한 입법 전략이 통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프랑스 주간 르푸앙은 “기업에 대한 고령자 고용 및 고용률 공개 의무화 규정은 정부가 위헌 지적을 받을 것을 알고 삽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헌법위원회가 부분 위헌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문제가 될만한 것을 집어 넣었다는 뜻이다. 이 매체는 “이는 정부가 논란이 될만한 법안을 밀어붙일때 쓰는 매우 고전적 방식”이라며 “부분 위헌 판단을 통해 헌법위원회는 체면을 살리고, 정부는 실리를 취했으며, 노조와 야당은 패배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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