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질서’ vs ‘민생 포퓰리즘’…시대 흐름 잡기 싸움 치열

2023. 4. 15.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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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톺아보기] 여야, 담론 주도권 경쟁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을 방문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뉴시스]
총선이 1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정치권은 국정 안정론 대 정권 심판론의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여야의 담론 싸움 또한 치열하다. 현실 정치는 늘 시대 흐름을 체계적으로 규정하는 담론 경쟁의 장이었다는 점에서 어느 쪽 담론이 민심의 호응을 얻느냐가 향후 정국 주도권의 향배를 좌우할 공산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지금 여야가 내세우는 대표 담론은 ‘법과 질서(Law and Order)’ 대 ‘민생 포퓰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법적 지배와 사회 안정을 중시하는 전자는 보수의 전형적인 무기다. 반면 기득권에 맞서 서민의 대변자임을 강조하는 후자는 종종 진보의 유용한 득표 전략으로 활용돼 왔다. 여야 모두 총선 승리를 위해 나름 효능이 검증된 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셈이다.

먼저 법과 질서론의 경우 최근 강남 학원가 마약 음료 사건과 납치·살해 사건 등이 잇따르면서 정부의 강경 대응이 힘을 받는 모습이다. 역대 최대인 840명 규모의 마약 범죄 특별수사본부도 구성했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마약 수사를 전담하는 강력부의 부활까지 지시했다. 법과 질서 담론의 또 다른 대상인 노동 개혁에 대해서도 건설 현장 폭력 행위 수사나 회계 자료 제출 의무화 조치 등을 통해 더욱 고삐를 죄고 나섰다.

야권의 민생 포퓰리즘도 한층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물가·금리·부동산·고용 등 경제 현안과 관련해 ‘민생 4대 폭탄 대응단’을 띄우며 윤석열 정부의 정책 허점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 공세도 민생 정당 이미지 강화 전략의 연장이란 게 당 주변의 공통된 견해다. 정부가 일부 대학을 대상으로 시작한 1000원 아침밥 사업을 모든 대학으로 확대하자며 오히려 판을 더 키우고 나선 것도 MZ세대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이슈를 ‘야당의 어젠다’로 전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란 분석이다.

그렇다면 여권의 내세우는 법과 질서 담론의 강점은 뭘까. 첫째, 이는 잔인한 신종 범죄가 난무하는 불안한 사회 속에서 안정을 바라는 여론의 흐름에 부합한다. 넷플릭스 드라마가 아니라, 강남 학원가라는 엄연한 현실 세계에서 마약이 유통됐다는 점에서 특히 대도시 중산층에겐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이는 검찰 출신인 윤 대통령과 한 장관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 중 하나다. 정부 주요 보직에 다양하게 포진한 검찰 출신 인사들도 언제든 법과 질서 담론의 체계적 행위자로 나설 수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선거 전략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특히 1단계 목표인 보수 지지층 결속에 효과적인 카드라는 데 이견이 없다. 더 나아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의 사법 리스크도 지속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 자신의 강점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네거티브 공세 효과도 자연스레 얻을 수 있는 게 좋은 전술이라고 볼 때 법과 질서론은 이 기준을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는 셈이다.

반면 단점 또한 적잖다. 현 정부의 법과 질서 담론은 1970년대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내세웠던 마약과의 전쟁이나 1990년대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이 선포했던 범죄와의 전쟁과 흡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이 담론의 탁월한 구사자였던 닉슨 전 대통령과 줄리아니 전 시장 때는 지금의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범죄가 만연하고 사회적 소요가 극심한 시절이었다. 최근 한국의 정치 지형과는 담론의 형성과 전개 맥락이 사뭇 달랐다는 얘기다.

게다가 최근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법과 질서를 여권 제1의 대표 담론으로 내세우는 게 과연 효과적일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끊이질 않는 게 현실이다. 여기에 대통령 측근 검사들의 대거 공천 루머나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둘러싼 끊임없는 논란 등도 이 담론의 효과를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민생 포퓰리즘은 현재 한국 경제의 전반적인 흐름이나 불평등 악화 추세에 더 부합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재명 대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 시리즈로 대선후보까지 올랐던 이 대표다. 또한 중산층과 서민의 고통에 공감하는 정당이란 이미지 강화를 통해 핵심 지지층을 견고히 다지는 데도 유리하다. 이를 통해 민생을 챙기는 정치 대 법과 질서를 앞세우는 정치라는 선명한 대립 구도를 형성할 수도 있다. 만약 내년 총선을 앞두고 경제가 계속 악화될 경우 민생 포퓰리즘은 더욱 힘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또한 단점이 만만찮다. 1990년대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은 개인 캐릭터에 대한 유권자의 비호감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세운 서민 정책에 대한 대중의 호감을 최대한 활용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지금의 민주당과 이 대표는 사법 리스크의 덫에 갇혀 있다 보니 민생 행보 효과가 일정 수준을 넘기 어려운 게 냉정한 현실이다. 더욱이 기본 대출 등 민생 포퓰리즘 시리즈가 핵심 지지층엔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인기 영합주의라는 비판과 그동안 누적된 신뢰성 결핍 등을 감안할 때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적잖다.

관건은 여야가 이 같은 담론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며 진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냐다.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여의도 정가에서도 지금의 교착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다수다. 윤석열 정부는 법과 질서 담론을 채택하면서 결과적으로 민생 프레임을 야당에 내준 셈이 됐지만 총선이 다가올수록 클린턴의 중도주의 재집권 전략에 대한 당 안팎의 관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브루스 리드 같은 정책 참모가 존재했던 클린턴의 백악관과 지금의 대통령실은 사뭇 다른 상황이란 점이다.

야권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비록 당내 균열은 임시 봉합했지만 총선이 임박할수록 갈등이 재연될 소지도 충분하다. 그냥 지금의 민생 프레임만 적당히 유지·관리해도 승리할 거란 유혹이 결국엔 민주당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우려도 높다. 여권의 ‘자의적인 법과 질서 담론’과 야권의 ‘유능하지 못한 민생 포퓰리즘 담론’이 내년 총선까지 이어지는 건 유권자 입장에선 가장 피하고 싶은 구도다. 이런 상황에서 9월 추석 때까지 이어질 총선 1라운드의 최대 관전 포인트도 어느 쪽이 먼저 담론의 재구성과 보완에 나설 것이냐에 모아질 전망이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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