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올인한 학생들 입학 땐 이미 번아웃…서열화부터 없어져야”

김수미 2023. 4. 15. 01: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엔 철학은 없고 기능만 남아
그러다보니 변별력 집착증 심해지고
‘닥수’ ‘문과침공’ 등 독특한 현상 나와
수학 집착증 벗어나 국어·영어 살려야
학계선 순혈주의·학벌주의 붕괴 시작
대학 차별화로 입시 바뀌어야 교육 살아

교육이 없는 나라/이승섭/세종/1만8500원

“저는 우리나라 중·고등 교육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중·고등 교육을 바꾸려면 입시가 달라져야 하고 그러려면 대학부터 건드려야 합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부총장과 입학처장, 글로벌리더십센터장, 학생처장을 지낸 이승섭 기계공학과 교수는 지난 12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한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 교육은 철학이 없고 기능만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는 지난 12일 세계일보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언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해야 하느냐인데, 제 대답은 대학교 2학년이다. 고3 때 배운 것으로 평생 먹고살 게 아니라 대학에서 공부한 걸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원 선임기자
그는 스스로 열심히 공부했던 학생으로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쳐본 교수로서, 자식을 키워본 부모로서 느낀 한국 교육의 문제와 고민을 담아 신간 ‘교육이 없는 나라’(세종)를 펴냈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이 입시에 전력질주하고 막상 대학에 오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언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했냐고 물어보면 (특목고 입시를 준비한) 중2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대학에 오면 (놀아야 한다는) 보상심리가 생기고, 원하는 대학에 못 간 학생들은 패배감을 안고 시작한다”고 지적했다.

고3 때까지 입시에 짓눌려온 학생들은 번아웃된 상태로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 이 교수는 “카이스트는 수학, 과학을 잘하는 학생보다 좋아하는 학생을 원한다. 문제는 못 풀면 다시 풀면 된다. 긍정적이고 (공부를) 재미있어 하는 친구들이 잘한다”며 “대학에 들어가면 끝이 아니고 겨우 이제 시작인데, 우리 학생들은 너무 지친 채로 와서 열정과 흥미, 상상력이 아쉽다”고 했다.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 이제원 선임기자
그가 동료교수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출신고교별 학생에 대한 만족도가 대학은 영재고-과학고-일반고 순이었지만, 대학원에서는 일반고-과학고-영재고 순으로 뒤집혔다. 중·고교에서 공부 잘하는 것과 대학에서의 연구, 사회에서의 성공은 같지 않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다.

과열된 입시 경쟁에는 변별력에 대한 한국사회의 유난한 집착이 자리한다. 변별력을 수학에서 가리다보니 ‘닥수’(닥치고 수학), ‘문과 침공’(이과생들이 문과생을 제치고 인문·사회 계열에 대거 입학)이란 말이 나오고, 초등학생 때부터 수학 선행에 매달리는 현실이다.

이 교수는 “수학에 그렇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 수학 때문에 원하는 대학에 못 간 경우는 있지만, 성인이 된 후 후회하는 것은 어디 가서 영어 한마디 못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이승섭/세종/1만8500원
그는 입학처장 재임 당시 직접 입시에 변화를 시도했다. 카이스트 면접에 없던 영어 인터뷰를 추가하고 수학 난이도를 낮췄다. 이 교수는 “영재고와 과학고 선생님들을 만나보니 아이들이 영어시간에 자거나 수학, 과학 공부를 한다고 했다. 막상 카이스트에 입학하면 영어로 수업하는데 말이다”라며 “살면서도 수학 문제 조금 더 푼 것보다 영어 좀 더 잘하는 게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영어를 아예 놓지 않되 과외까지 할 필요는 없도록 간단한 자기 소개로 시작해 그림을 보고 설명하는 수준의 영어 면접을 단계별로 도입했다. 수학도 40∼50점이었던 평균점수를 70점으로 맞춰달라고 출제위원들에게 부탁했다. 이 교수는 “좀 쉬워서 평균이 올라도 변별해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변별력에 목을 매다 보니 공정이 과정이 아닌 목적이 돼버려 교육을 왜곡시킨 것”이라며 “문제는 그것들이 아이들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국어교육 역시 고민이었다. 그는 “공대교수끼리 얘기해봐도 국어 잘하는 학생들이 좋은 논문 쓰고 창의적이더라”면서 “우리 국어 교육은 말하기, 듣기, 쓰기는 소홀하고 (글의) 주제 파악에만 집착한다. 왜 이런 식민지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무조건 변별력을 따지려다 보니 대학입시가 그 틀에서 못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BBC가 한국의 수능을 ‘인생이 걸린 시험(Life changing exam)’이라고 표현했듯 대학 입시에 인생을 걸기에 학생들은 진짜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녹초가 되고, 편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 교수는 대학 입시의 가치가 떨어지고 대학의 서열화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대학 차별화다.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 이제원 선임기자
이 교수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학 간 교수들 수준 차이가 별로 없다. 따라서 거점국립대는 등록금을 다른 대학 10분의 1 수준으로 내려서 ‘SKY 갈까, 거점국립대 갈까’ 고민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거점 국립대 가도 서울대 졸업생처럼 삼성전자 입사에 어려움이 없다면 거기 가서 공부 열심히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어 “서울대는 학부는 줄이고 대학원을 늘려 국제적 경쟁력을 더 강화하고, 지방거점대학들은 지역 중점사업과이 연계로 맞춤형, 다양화된 커리큘럼으로 경쟁력을 갖추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 서열화는 우리 사회에 공고한 학벌주의 때문이지만, 이 교수는 이미 학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을 때 (서울대) 동기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다른 대학 친구들이 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부총장하면서 신임교수 뽑을 때도 다른 대학에서 온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면서 “순혈주의, 학벌주의가 가장 심한 학계가 이 정도면 기업들은 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섭 카이스트 교수. 이제원 선임기자
이 교수는 책에서 대학교육의 변화를 시작으로 중·고등 교육이 나아갈 방향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가 이 책을 쓴 목적, ‘행복해지길 바라는 학생들’에게는 “첨단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저도 20∼30년 전 마이크로, 나노, 바이오를 하며 첨단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면 이미 그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들이 특허를 다 갖고 있어요. 첨단을 쫓아갔을 때 내가 최고가 못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첨단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