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 친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자 연구자

김용출 2023. 4. 15.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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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김구 암살, 5·16 쿠데타…
美 외교관으로 머물며 생생히 목도
한국에 깊은 애정과 냉철한 조언
박정희 정권 반대하다 추방 수모
DJ 납치사건 땐 키신저에 연락 구출
한국 정치 고전 ‘회오리의…’ 저술도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김정기/한울엠플러스/5만원

1948년 8월15일, 옛 중앙청 광장에서 많은 시민과 정부 관계자, 주한 외교사절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연단 아래에는 군인들과 밴드가 자리했고, 큰 태극기를 배경으로 연단 위에선 한복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과 군복을 입은 더글라스 맥아더 총사령관, 선글라스를 쓴 존 하지 장군을 비롯해 새 정부 수반과 내외빈, 내외신 기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기념 연설에 이어 맥아더 장군의 축하 연설이 끝나자 갑자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하얀 정장을 한 백인의 손을 잡고 맥아더 장군에게 소개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사진 기자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일제히 플래시를 터뜨렸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사람은 바로 주한 미국대표부의 부영사 그레고리 헨더슨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자 연구자인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의 일대기와 사상을 다룬 책이 최근 출간됐다. 헨더슨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기념식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사이에 서있는 모습. 출판사 제공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여순 사건, 국회프락치 사건과 김구 암살, 한국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그는 두 차례에 걸쳐 7년 동안 주한 미대사관 소속 외교관으로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목격한 증인이었고, 한국 정치에 대한 고전이 된 책 ‘회오리의 한국 정치’를 저술한 저명한 연구자였으며, ‘한대선’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한국 문화와 사상의 애호가였다.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목격자이자 연구자인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의 일대기와 사상을 다룬 책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이 최근 김정기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 명예교수에 의해 출간됐다. 모두 3부로 이뤄진 책은 헨더슨의 삶의 궤적과 한국과의 인연, 그가 본 한국 정치의 현실과 대안, 그의 사상과 실천을 종합적으로 조명한다.

1947년 국무부에 들어간 뒤 조지 매큔에게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배운 그는 이듬해 7월 겨우 26세의 나이로 주한 미국대표부 부영사로 부임,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이후 1948∼1950년과 1958∼1963년 두 차례 주한 미대사관 소속 외교관으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목도하게 된다.
김정기/한울엠플러스/5만원
1951년 말 독일로 전보되면서 한국을 떠났고 1955년부터 국무부 본부의 외교연구소 극동문제 연구책임자로서 한국문제를 분석했다. 이 시기,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논문 ‘정다산: 한국 지성사 연구’를 집필해 발표하기도 했다.

1958년 봄 주한 미대사관으로 돌아온 그는 11월 정약용이 오랫동안 유배를 했던 전남 강진을 찾아서 그의 흔적을 답사하기도 했다. 곧이어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변곡점이었던 1960년 4·19혁명과 박정희 그룹이 주도한 5·16쿠데타를 목도했다.

그는 박정희 그룹의 군사쿠데타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1962년 말에는 박정희가 과거 엄청난 공산당 음모를 꾸몄고, 여순 사건으로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자 살기 위해서 자신의 부하들을 팔았다는 공산주의 전력 보고서를 작성해 국무부에 보고했다. 결국 그는 1963년 3월 이른바 ‘이영희 사건’을 빌미로 ‘기피 인물’로 찍혀서 추방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1961년 장면 총리(맨 오른쪽)와 윤보선 대통령이 악수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 출판사 제공
그해 말 국무부를 사직한 그는 이듬해부터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에서 한국 정치 및 한반도 문제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1968년에는 자신의 주저이자 한국 정치에 대한 고전 ‘회오리의 한국정치’를 저술했다. 그는 책에서 한국 사회와 정치가 응집력이 결여된 모래성 속성을 보인다며 ‘단극 자장의 회오리 정치’라고 비유했다. 전쟁과 과도한 보수주의로 중도파와 온건파를 비롯한 한국 정치의 중간지대가 상실된 것이야말로 ‘서울의 비극’이라며 유일한 처방은 중간지대로의 정치 합작이라고 강조했다.

각종 언론 활동을 통해서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 실질적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그는 박정희의 10월 유신을 비판했고,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때에는 하버드대 제롬 코언 교수를 통해 헨리 키신저에게 연락해 김대중을 구출하도록 했다.

책은 1988년 68세의 나이에 돌연한 죽음을 맞기까지 한국인들에게 애정 어리면서도 냉철한 관찰과 조언을 멈추지 않았던 헨더슨이라는 인물로 우리를 이끈다. 평전과 논문 모음 중간 정도의 성격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증언자 헨더슨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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