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개혁 이어 성지 갈등…네타냐후 강경책에 중동 ‘흔들’
격랑에 휩싸인 이스라엘
이스라엘 일간지 하아레츠와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에 따르면 네타냐후 총리는 지난해 12월 말 극우 정당과 초정통파 종교 정당 등과 연립정부를 이뤄 재집권한 뒤 국내외 현안과 관련해 초강경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인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 확대를 선언한 데 이어 이스라엘의 오랜 전통이던 입법부와 사법부 간 권력 균형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사법 개혁에도 적극 나섰다. 네타냐후 총리는 시위가 격화하자 사법 개혁은 일단 연기했지만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성지 갈등은 이슬람 단식월인 라마단과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대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지난 4일 이후 한층 심화되고 있다. 물리적 충돌은 라마단을 맞아 팔레스타인 무슬림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에 몰리자 이스라엘 경찰이 질서 유지를 이유로 이곳을 급습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 중 하나인 가자 지구를 장악한 무장 정파 하마스와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정파 헤즈볼라, 시리아의 무장 대원 등이 잇따라 이스라엘을 향해 로켓 공격을 가했고 이스라엘도 곧바로 보복 공습에 나섰다.
내부 치안도 불안해졌다. 이스라엘 최대 도시인 텔아비브에서는 지난 7일 차량 돌진 테러가 발생해 이탈리아인 관광객 한 명이 숨지고 일곱 명이 다쳤다. 같은 날 서안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인근 고속도로에선 영국계 유대인 자매가 총격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중동 유일의 민주국가이자 법치 국가, 석유와 가스 없이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 5만5359달러(2020년 기준)의 경제 발전을 이룬 ‘스타트업 국가’이자 지역 군사 강국인 이스라엘이 네타냐후 총리 취임 이후 안팎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는 모습이다. 이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 숙적 이란과의 갈등 격화 등 중동 정세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는 1992~95년 아론 바라크 당시 대법관이 주도한 ‘헌법 혁명’의 결과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엔 단일 헌법이 없으며 크네세트(의회)·대통령·정부·군·경제·인권 등에 관한 13개의 기본법이 이를 대신한다.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 개혁은 이런 대법원의 결정을 크네세트 표결로 뒤집을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신임 대법관 등 법관을 새로 임명하는 법관선정위원회도 정부가 지명한 위원 비중을 확대해 사실상 의회가 판사 임명을 좌우할 수 있게 했다. 그동안 각 부처 장관은 법률자문관의 조언을 따라야 했는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도록 했다.
그동안 이스라엘 좌파는 인권 보호와 입법·행정·사법부 간의 견제와 균형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현행 시스템을 지지해 왔고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 또한 높다. 예루살렘 포스트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63%는 ‘대법원은 기본법에 부합하지 않는 법률을 폐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60%는 ‘견제와 균형을 위해 현행 법관 선출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팔레스타인에 강경한 보수층이나 국가 간섭을 거부하는 종교 관련 정치인들은 이런 시스템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특히 서안 지구의 유대인 정착촌 확대를 제한한 대법원 결정은 강경 보수파가 오랫동안 사법 개혁의 칼날을 갈게 된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이들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대법원이 ‘사법 적극주의’를 내세우며 사실상 정치에 개입한다고 비난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네타냐후 총리가 사법 개혁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 것은 새로 구성된 연립정부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2021년 6월 총리에서 물러난 네타냐후는 지난해 11월 총선 이후 정당 간 협상을 통해 새 연립정부를 구성한 뒤 지난해 12월 29일 다시 총리에 올랐다. 120석의 크네세트에서 연립정부는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 32석을 포함해 64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극우·종교 정당들과의 연정이 불가피했고 이후 이들 정당의 강경·근본주의 정책이 주요 공약으로 채택된 게 결국 사법 개혁 급발진으로 이어지게 됐다.
사법 개혁으로 촉발된 시위가 급속히 확산된 데는 네타냐후 총리의 비도덕성에 강한 거부감을 보여온 ‘비비(네타냐후 별칭) 반대 정서’도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2016년부터 뇌물수수·횡령 등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아 왔다. 여기에 코로나 방역에 대한 불만까지 겹치면서 2020년 3월부터 2021년 6월까지 ‘부끄러움의 행진’이란 반네타냐후 시위가 이스라엘 전역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네타냐후의 부패 스캔들이 시민들의 각성과 행동을 촉발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네타냐후 총리가 같은 당 소속으로 사법 개혁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을 해임하자 곧장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노조도 파업에 돌입했다. 여기에 당내 분열 조짐까지 보이자 결국 네타냐후 총리는 입법을 연기하겠다며 한발 물러섰고 갈란트 장관 해임 결정도 철회했다.
이 과정에서 네타냐후 총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사법 개혁안 폐기를 사실상 압박하자 “이스라엘은 외국의 압박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주권국가”라고 반발하면서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이란 핵합의(JCPOA) 복원 협상에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해 이스라엘이 불쾌감을 드러내는 등 양국 관계가 미묘해진 상황에서 불거진 갈등이란 점에서 국제사회도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서방국가들 사이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중동마저 격랑에 휩싸일 경우 지구촌 정세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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