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지인 협박하고 알몸사진 유포…사채 덫에 ‘지옥’ 생활
불법 채권추심 피해 확산
정명근(31세·가명)씨는 지난 2월 22일 새벽 5시쯤 맨발로 뛰어다녔다. 불법 사채업자들의 사무실에서 도망치는 상황. 정씨는 “돈을 갚으라며 윽박지르고 살해 협박까지 하니 가서 일이라도 해서 갚겠다고 했다”며 “그런데 그곳에서 돈을 받아 오라고 시키는 일을 보니 도저히 아니다 싶어서 탈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 추심. 쉽게 말해 빚 독촉을 위한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현행법상 채권 추심자는 채무자의 가족이나 동료에게 변제 독촉을 해서는 안 된다. 변제를 위한 만남이나 연락 자체가 위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채업자가 빚을 독촉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은 채무자들이 빌린 돈에 이자까지 다 갚았는데도 불구하고 약점을 쥐고 흔들며 끊임없이 돈을 보낼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경찰 국가수사본부는 지난해 미등록대부 및 불법 채권추심 등 불법 사금융 범죄 1177건을 가려내고 2085명을 검거했다. 범죄수익 53억여 원도 몰수·추징했다. 불법채권 추심 관련 피해상담·신고 건수도 늘어나고 있다. 2021년 867건에서 지난해 1109건으로 30%가량 증가했다. 올해 1~2월은 271건. 지난해 같은 기간 127건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제 피해 건수는 신고 건수의 3~4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정씨도 불법 채권 추심 피해 신고자 중 한 명이다.
최고 연 4000% 고리 이자 받기도
시작은 전세 자금에 필요한 1000만원이었다. 그는 “돈을 빌리려면 절차상 필요하다며 내 주변 사람의 연락처를 기록해야 한다길래 알려줬다”며 “그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출 액수는 사채업자가 마음대로 정했다. 이자는 터무니 없었다. 상환이 늦으면 부모님, 심지어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선생님에게까지 전화했다. 이자만 1년 새 1억5000만원에 달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은 ‘갚을 돈이 없으면 안 갚으면 되지 않냐’,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는데 24시간 내내 협박에 노출되면 돈을 주고라도 이 힘든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며 “경찰에 신고해도 대포폰과 대포통장을 사용하는 이들이라 추적이 쉽지 않고, 왜 돈을 빌렸냐고 추궁을 당하기도 해서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은 “피해자들은 신고를 하면 보복을 한다는 불법 채권 추심자의 으름장에 경찰에 연락하기가 꺼려지고, 경찰이 막상 검거해도 돈을 돌려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현실적인 도움을 받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채무자의 얼굴 사진을 음란물 등에 합성해 빚 변제 독촉을 하기도 한다. 50대 남성 최국현(가명)씨의 경우다.
최씨는 생활자금 100만원이 필요했다. 대부업자는 “신용도가 낮으니 알몸을 찍어서 보내라”고 최씨에게 요구했다. “돈만 제때 갚으면 아무 일 없을 것”, “당신은 남자인데 알몸사진이 뭐 어떻냐”라는 말도 곁들였다. 최씨는 알몸사진을 찍어서 대부업자에게 전송했다. 이후 대부업자의 빚 독촉에 몰린 최씨는 “나중에 내 얼굴을 몸에 합성해 지인들을 전부 초대한 단톡방에 뿌리더라”고 전했다. 최씨는 현재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정리됐고, 정신적인 충격으로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호소했다.
부산청 강력범죄수사대에서는 지난해 이러한 성착취 수법으로 총 3500명에게 최고 연 4000%가 넘는 고리 이자를 받아낸 대부조직원 66명을 검거했다.
경찰청·금감원, 10월까지 집중 단속
불법 추심 피해는 2차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업자금으로 30여 곳에서 사채를 끌어다 쓴 뒤 협박에 시달리던 40대 여성 유모란(가명)씨. 그는 얼마전 또다른 사채업자로부터 1000만원만 주면 이자랑 원금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씨는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안 보였는데 같은 업계 사람의 연락을 받으니 덜컥 믿음이 생기더라”며 “현금으로 1000만원을 해당 사채업자들에게 지급했는데 이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단순히 전화를 받지 말라는 것뿐이였다”고 전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얻었다고 생각했던 유씨는 다시 절망했다. 이 소장은 “이런 2차 피해는 사채가 아니라, 돈을 받아놓고 연락을 끊는, 사기와 절도를 결합한 보이스피싱”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불법 사채의 경우 피해 복구가 쉽지 않기에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세일 변호사는 “한두명의 피의자들을 잡아도 이들이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윗선을 잡기는 어려울 수 있다”며 “과도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항상 의심해야 한다. 한번 정보를 넘기면 회수가 불가능하고, 급한 불을 끄려다 더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피해자들은 힘들더라도 꾸준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법무법인 대건의 한상준 대표 변호사는 “불법 사채업자들이 1만명에게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끝까지 물고 넘어지는 피해자가 10명도 안 된다면, 피해 사례가 이어질 것”이라며 “상황이 어렵고 더는 엮이고 싶지도 않겠지만, 피해자들이 집단 소송이나 어떤 방식으로 끝까지 목소리 내려고 노력해야 합의, 변제 등의 가능성이라도 커질 수 있다”고 전했다.
불법 추심 피해가 계속되자 경찰청과 금융감독원은 3월 20일부터 10월 31일까지를 성착취 추심 등 불법채권추심 특별근절기간으로 정하고 집중 단속한다고 지난달 19일 밝혔다. 그러나 지금도 협박과 폭언에 노출돼있는 피해자들에게는 불법 추심을 멈추게 할 대책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힘없이 돈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계속.
■ 보이스피싱 총책서 해결사 된 이기동 소장 “채무자 실질적 지원 체계 갖춰야”
이 소장은 누구길래 사채업자들도 입에 올렸을까. 이 소장은 20대 시절 8년간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포통장 모집 총책으로 활동했다. 그 대가로 2년 6개월간 감옥생활도 했다. 이 소장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 불린다. 지금까지 1500여 명의 불법 사채 피해자들과 인연을 맺었고, 한 사람당 적게는 5건, 많게는 120건의 피해에 도움을 줬다. 이 소장은 “보이스피싱 총책으로 붙잡혀 수사를 받던 중 한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내가 칼만 안 들었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려 어둠의 생활을 청산했다”고 말했다.
2014년 출소한 이 소장은 가장 잘 아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금융범죄 예방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그해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라는 책을 썼다.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수법, 예방법 등 업계 사람들만 알만한 내밀한 이야기를 담았다. 2015년 금융당국이 보이스피싱 예방 대책으로 내놓은 ‘30분 지연 인출제도’(100만원 이상)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악성 부채 정리 과정을 보여주는 유튜브 방송을 매주 진행하는 이 소장은 불법 사채 피해자들을 대신해 사채업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한다. 경찰에 찾아갔다가 사채업자들에게 오히려 더 심한 협박을 당한 이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는 이들 등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이 소장은 ‘해결사’다. 이 소장은 “피해자가 나한테 돈을 맡겨 뒀으니 나한테 와서 찾아가라는 식으로 불법 사채업자와 피해자를 단절시키는 게 우선”이라며 “대부분의 피해자는 ‘돈을 빌려서’, ‘개인정보가 털려서’ 등 약자의 입장에서 대응하려고 하니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그가 있는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는 24시간 가동된다. 이 소장은 “채무자는 1분 1초가 급한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면 일주일이 지나서야 수사에 들어가는 데다가 그마저 적극적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며 “사회가 채무자를 실질적으로 돕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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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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