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보이는 이 세상의 작은 틈
김희선 지음
현대문학
의약분업(2000년) 이후 약국은 병원 처방전에 따라 앵무새처럼 약을 파는, 거대 보건산업의 말단 창구처럼 느껴진다. 약사 겸 SF 작가 김희선씨가 지키는 ‘밤의 약국’에서는 다르다. 이곳에는 이를테면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 죽고 싶다는 청소년이 깊은 밤 느닷없이 뛰어든다. 상담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정부 시책에 따라 약국이 ‘청소년 지킴이 시설’도 겸하던 시절 이야기다. 이과 적성이어서 약대를 선택했겠지만, 추리·스릴러·SF 소설에 심취하다 보니 특유의 문학 감수성까지 장착, 결국 작가가 된 김씨는 이렇게 밝힌다.
밤늦게까지 약국을 지키며 실은 밤을 지키는 듯한 기분이었노라고, 그때 어둠은 세상의 작은 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고.
김씨는 그 틈을 두고 아주 좁고 가느다랗다고, 아침 해가 떠오르면 서서히 닫혀버린다고 표현한다. 세상의 빛깔은 실은 밤의 약국을 에워싸는 어둠처럼 검푸른색이거나 짙은 남보라색이다. 낮시간의 온갖 다채로운 빛깔은 그 어둠을 덮기 위한 위장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산문집은 그 틈에 관한 이야기들이겠다. 오래전 원주역사 한구석을 생뚱맞게 지켜 ‘꿩빈 역장’이라고 불렸던 꿩에 대한 추억, 항상 남자 노인들에게 고가의 영양제를 사게 한 다음 나중에 홀로 돌아와 반품하고 돈을 받아가던 할머니, 공포영화 주인공이라면 반드시 숙지해야 하는 열다섯 가지 생존 요령 등이 나온다. 왕성한 식욕의 김씨가 섭렵한 숱한 책과 영화, 약사 김씨가 만난 사람과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어떤 사람’은 단편소설 같다. 박스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던 그는 버려진 종이 박스를 수거해 연명했다. 그래서 박스맨이다. 그런데 박스맨은 춤추기를 좋아했다. 음악 소리만 들리면 어디서나 췄다. 약국의 공짜 커피도 좋아했다. 그런 그를 누구나 반말로 대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스맨은 홀연히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씨는 쓴다. 도시에는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고. 그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싶다고.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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