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과 함께 반세기, 현장에 매진한 ‘오반장’

이후남 2023. 4. 1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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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에서 삶을 본다
철에서 삶을 본다
오완수 지음
아템포

지은이는 경북 의성에서 열 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농사꾼이던 아버지는 해방 무렵,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리어카를 끌며 국제시장 노점상으로 철물 장사를 시작해 철물 도매상으로, 공장을 인수한 철강재 생산기업으로 키웠다.

건강을 챙길 겨를은 없었다. 아버지는 1973년 세상을 떠났다. 20대 때부터 곁에서 일해온 30대 초반의 맏이는 부친의 뜻을 이어 회사와 대가족을 책임지게 된다. 학생인 막내를 포함해 아홉 명의 동생들은 대부분 결혼 전이었다.

이 책은 부친이 창업한 회사를 국내 철근생산 3위 기업으로 키운 오완수(1939~2022) 대한제강 회장의 자서전이다. 2012년까지 집필한 글인데, 오회장은 책으로 내는 걸 거듭 반대하다 생전에 내지 않는 조건으로 허락했다고 한다. 지난해 4월 세상을 떠난 그의 자서전이 1주기에 나온 배경이다.

지팡이를 짚은 오완수 대한제강 회장(왼쪽)이 직원들과 함께 공장을 둘러보는 모습. [사진 대한제강]
책에는 한국전쟁 전후 부산의 모습을 비롯해 성장기의 경험과 기업인으로서의 경험이 고루 담겼다. 회사가 아주 힘들었던 시기의 이야기도 생생하다. 부친의 별세 직후도 그랬지만, 2차 석유파동으로 건설 경기가 악화한 80년대초부터가 특히 그랬다고 한다. 부도를 피하기 힘들 것 같단 생각에 그는 평소와 달리 아내에게 회사 상황을 전했다. 마침 딸의 대입이 코앞이었다. 아내는 회사 문 닫는 것을 딸의 시험 이후로 미루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다고 한다. 이를 비롯해 선친이 맨몸으로 일군 기업을 물려받은 초기 20여년을 그는 “다시 돌아보기 싫을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돌이키면서도 “끝없이 다가오는 도전에 맞서 고통을 이겨내고 인내하는 가운데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기업”이라고 전한다.

이런 그가 “가장 강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은 극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쓴 대목도 흥미롭다. 그는 세상을 정글의 법칙으로, 약육강식의 논리로만 이해하지 말라고 강조한다. “약육강식의 논리에 사로잡히다 보면 상대를 잘 헤아리지 못하고 경쟁업체는 물론 자기 직원이나 협력업체들까지 적대시하기 쉽다. 이런 태도가 반짝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자승자박하는 꼴이 된다. 또 모든 상황을 전투적으로 대하다보면 기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인 평정심과 판단력이 흔들리기 쉽다.” 그는 기업 역시 경쟁해야 할 상대는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말한다.

책 첫머리에 쓴 얘기와도 통한다. “쇠를 그냥 놓아두면 금방 녹이 슬어 못 쓰게 된다(…)기업도 마찬가지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만족하고,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녹이 슬고 망가진다. 뜨거운 열기에 달구어지고 두드려 맞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기 변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가며 성장할 수 없다.”

기업인으로서 그는 크게 두 가지 원칙을 지켜왔노라 돌이킨다. 첫째는 사업을 하면서 정치권력의 힘을 빌려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는 것. 둘째는 늘 현장에서 답을 얻는 것. 그는 24시간 체제로 돌아가는 공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매일 일과를 시작했다. 현장을 중시하는 그에게 직원들은 “종교가 공장”이라며 ‘오반장’이란 별명으로 붙여줬다. 그는 제조업의 경영자가 현장을 잘 모르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을 “뿌리 없는 나무에 열심히 물을 주는 것”에 비유한다. 책에는 현장을 아는 것이 대규모 설비투자 등에서도 어떻게 힘이 됐는지 구체적 경험이 나온다.

평생 한눈파는 일 없이 현장에 매진해온 그이지만, 유일한 일탈의 시기였던 고교 시절 얘기도 재미있다. 중·고교부터 입시가 치열하던 시절, 부산 출신으로 서울의 명문고에 진학한 그에게 서울 출신 학생들이 종종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사실 그는 중학교 때 작심하고 권투를 배웠던 터. “힘자랑도 지겹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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