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말해보게. 제발."
1520년 3월, 로마. 늙은 의사가 몸져누운 사내에게 부탁했다. "똑바로 말해야 올바른 치료를 할 수 있어." 의사는 이제 울 듯했다. "…잘못되면 자네가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일세." 의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홍조를 띤 사내는 은은하게 웃기만 했다. 의사가 이렇게나 애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의사는 이 사내가 아까웠다. 벌써 잘못되기에는 그 매력, 그 재능이 너무 아쉬웠다.
그럴 만했다.
일단 이 사내는 외모가 탁월했다. 부드러운 얼굴은 모성애를 자극했다. 깊은 눈망울은 꿈을 꾸는 듯했다. 그는 잘 웃었다. 예의도 발랐다. 눈웃음, 우아한 손짓 하나에 모두가 녹았다. 더 놀라운 게 있었다. 재능이었다. 이 사내의 예술성은 그의 기적 같은 외모, 성격보다 찬란했다. 그를 놓고 책임감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욱하지 않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의사뿐 아닌, 그 시절 로마 사람이면 누구든 이 남자를 살리고 싶어 할 터였다. "자네도 정말 몰라? 짐작 가는 일도 없어?" 의사는 이제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은 훌쩍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나의 어색함이 있었지만, 의사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의사 선생님. 열이 나요. 그뿐이에요."
조금 쉬면 괜찮아지겠지요…. 이 사내는 힘겹게 말을 덧붙였다. 그는 공손했다. 숨을 그렇게나 거칠게 몰아쉬면서도 음성은 나긋했다. "이 사람아. 예전과는 달라. 열이 심상치가 않아." 의사의 말에 사내는 눈을 감았다.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부드러운 목소리만 희미하게 나돌았다. 의사는 답답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계속 열이 난다고만 했다. 미심쩍었지만 결국 그 말만 믿고 치료해야 했다. 의사는 사혈(瀉血)에 나섰다. 몸에서 팽팽 돌지 못하고 고여있는 피를 뽑는 치료법이었다. 폐 등에 울혈(鬱血·혈액의 과잉 등 비정상적 축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이를 빼내 열을 낮추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그의 피를 뽑았다. 웬만큼 쭉쭉 끌어왔다. 하지만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신이시여,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신의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을…." 의사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땀과 눈물이 함께 떨어졌다. 의사는 손에 쥔 모든 것을 내려놨다. 수술 도구가 땅바닥에 요란히 뒹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시종도 쓰러져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영영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 누군가가 보이는 듯, 또 눈웃음을 짓곤 팔을 쭉 뻗었다. 그렇게 숨을 거뒀다. 사내의 이름은 라파엘로 산치오였다. 이날은 1520년 4월 6일이었다. 그가 고작 37살일 때였다.
라파엘로는 1483년,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움브리아는 예술의 땅이었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그런 곳에 있는 우르비노 내 궁정화가였다. 흔치 않게 이탈리아 북부 화풍부터 플랑드르 화풍까지 익힌 실력자였다. 시(詩)와 문학에도 조예 깊은 팔방미인이었다. 라파엘로는 예술가를 꿈꾸기에 완벽한 환경에서 컸다. 고사리손으로 붓을 들어도 뭐라고 할 이가 없었다. 아버지와 그의 동료 등 예술 교사는 차고 넘쳤다. 훗날 라파엘로는 그의 아버지 격인 레오나르도, 큰 형뻘인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어린 라파엘로가 이들과 나란히 이름을 올린 건 이런 첫 단추가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두 거장보다 예술을 보다 일찍 접했기에, 경험에서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레오나르도의 집안은 애초 예술과 거리가 멀었다. 미켈란젤로의 집안 또한 조상 중 예술가가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 예술을 하겠다고 하자 온 집안사람에게 매질을 당했다.
1491년, 라파엘로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가 8살 때였다. 라파엘로는 이제 아버지 작업실에서 거의 살았다. 그는 이를 계기로 벌써 실전에 돌입했다. 웬만한 청년 수습생도 나가떨어질 만큼의 훈련을 이어갔다. 라파엘로는 스승 운이 계속 따랐다. 그는 곧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작업실로 몸을 옮겼다. 페루지노는 실력과 가치관 모두 출중한 화가였다. 회화를 장기로 한 레오나르도는 조각 전문가 베로키오를 스승으로 삼았다. 미켈란젤로는 한량 기를란다요 밑으로 갔다가 1년 만에 실망해 빠져나왔다. 이들이 길을 돌아가는 동안, 라파엘로는 오직 직진했다.이 또한 라파엘로가 빠르게 성장한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그렇게 딱 맞는 스승을 소개한 후 곧 사망했다. 라파엘로가 11살 때였다.
이제 라파엘로는 예술에만 힘 쏟았다.
그는 재능을 한껏 펼쳤다. 라파엘로에게는 타고난 성실함도 있었다. 그렇기에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이미 17살 때부터 장인 대우를 받았다. 1군 화가로 손색없는 스승 페루지노를 금세 뛰어넘었다. 라파엘로는 21살 때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을 그렸다. 페루지노 그림 '천국의 열쇠를 받는 베드로'를 참고해 만들었다. 페루지노의 손길을 참고한 점 말고는 아예 다른 작품이 탄생했다. 선과 구도, 색상과 입체감, 인체 묘사와 풍경 표현 모두 스승보다 탁월했다.
라파엘로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누구든 나보다 나은 사람이면 배척하지 않고 인정하는 능력, 나은 점을 빨아들여 그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내고야 마는 집념. 사실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두 거인과 함께 걷게 된 데는 이 성향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 물론 라파엘로는 천재였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천재처럼 외골수는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그 눈부신 재능을 갖고서도 남에게 계속 배웠다. 자신에게 부족했던 능력을 마구 훔쳤다.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미술사가 하인리히 뵐플린은 라파엘로를 놓고 "다른 제자 중 라파엘로처럼 그의 스승이 가르치는 것을 쉽게 흡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라파엘로는 그렇게 페루지노에 이어 훗날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도나토 브라만테 등 천재 선배들의 장점을 모조리 흡수한다. 이를 자기 스타일로 재창조한다. 근 400년 뒤 한 사내가 라파엘로의 비밀을 파헤쳐 함께 거장 반열에 선다. 그의 이름은 파블로 피카소였다.
라파엘로는 페루지노와 작별했다.
라파엘로는 더 큰 세상으로 나섰다. 그는 1504년, 피렌체를 찾았다. 라파엘로는 움브리아 이상의 예술 중심지였던 피렌체에 흠뻑 취했다. 라파엘로는 그의 아버지와 스승 덕에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작품 의뢰를 받으며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런 라파엘로는 운명처럼 한 남자와 만났다.
온화한 외모, 우아한 자태, 끝을 알 수 없는 천재성….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와 마주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설렜다. 레오나르도는 완벽했다. 배우고, 흡수하고, 훔칠 것 천지였다. 라파엘로는 성자 같은 레오나르도를 깍듯이 대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라파엘로는 드로잉의 중요성을 다시 절감했다. 레오나르도 특유의 피라미드식 구성도 체화했다. 라파엘로는 1507년께 '알렉산드리아의 성 캐서린'을 그렸다. 이는 앞서 레오나르도가 그린 '레다와 백조'를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라파엘로는 이쯤부터는 레오나르도의 전매특허인 스푸마토(색깔과 색깔 사이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부드럽게 하는 음영법)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인물의 밀도와 선의 리듬감만 보면, 어쩌면 레오나르도보다도 한 수 위로 올라섰다.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있을 때 즐겨 그린 소재가 있다.
성모다. 현대 사회에서 라파엘로는 '성모의 화가'로도 통한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는 '최후의 심판'의 고전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성모'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창조했다.
1506년, 라파엘로는 '성 캐서린'을 그리기 1년 전인 그 해에 '대공의 성모'를 그렸다.
라파엘로는 성모가 마른 체격일 것으로 봤다. 그 시절 성서 인물들이 먹을 것을 찾아 종종 이동생활에 나섰다는 설을 따른 것이다. 그는 그런 성모가 포근한 웃음과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함께 품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라파엘로는 자기가 생각하는 성모를 확실히 떠올린 후 성모를 그렸다. 그렇게 탄생한 '대공의 성모'는 그 시절 모든 유럽인이 어렴풋이 상상하던 성모였다. 이 그림은 단숨에 모든 성모 그림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과거에 그려진 수십만장의 성모는 묻혔다. 앞으로 그려질 수십만장의 성모 또한 이 작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라파엘로는 같은 해 '초원의 성모'도 그렸다.
그림 속 성모 또한 당시 유럽인의 마음속 성모를 대변했다. 레오나르도의 장기인 피라미드식 구성을 완벽하게 끌어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라파엘로는 정답만을 찾을 수 있는 화가였다.
라파엘로는 선을 죽 그었다.
1510년, 로마. 라파엘로는 지금 바티칸 궁 '서명의 방'에서 벽화를 그리고 있다. 27살 때였다. 2년 전, 율리우스 2세 교황은 라파엘로를 로마로 불렀다. 교황은 로마를 신의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해 북유럽에서 불고 있는 종교개혁의 바람을 막으려고 했다. 신의 도시란 아름다운 도시를 뜻했다. 찬란한 천국의 문이 떠올라야 할 도시를 의미했다. 교황은 최고의 예술가를 모았다. 건축은 라파엘로의 고향 선배였던 브라만테, 조각은 미켈란젤로, 회화는 라파엘로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교황은 이들 중 라파엘로를 가장 좋아했다. 젊고 잘생긴 녀석이 실력도 좋고 유순했다. 브라만테처럼 음흉한 면도 없었고, 미켈란젤로처럼 대들지도 않았다. 교황은 라파엘로를 따로 초대했다. "그대에게 바티칸 궁의 의미 있는 방들을 맡기겠소."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통 크게 맡겼다. 당시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맡긴 '서명의 방'을 개인 서재처럼 썼다. 그에게 함께 안겨준 '엘리오도로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 '보르고 화재의 방' 또한 로마 내 최고로 성스러운 곳들이었다. 교황이 라파엘로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라파엘로는 '서명의 방' 네 벽면에 각각 철학, 신학, 법, 예술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라파엘로는 철학을 주제로 둔 벽에 대고 철학자를 한 명씩 그렸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유클리드…. 54명을 모두 다른 얼굴, 다른 자세로 표현했다. 훗날 그의 최고 역작으로 평가받는 '아테네 학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라파엘로의 이 그림은 상상화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와 로마 등에서 명성을 쌓은 철학자를 모은 작품이다. 한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플라톤은 손을 위로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을 아래로 두고 있다. 플라톤은 이 세상 너머의 이데아(Idea) 이론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 그 자체의 정체성, 에이도스(Eidos) 관념을 주창했다. 그렇기에 한 명은 하늘, 한 명은 땅을 찍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벗어진 소크라테스는 누추한 옷을 입고서 말을 쏟아내고 있다. 상대방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산파법을 구사하는 듯하다.
피타고라스는 쪼그려 앉아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다. 그의 제자들이 이를 흘깃 보며 받아쓰는 모습이다. 유클리드는 칠판에 대고 컴퍼스로 원을 그려주고 있다. 유클리드가 아닌 아르키메데스라는 말도 있다. 어린 추종자들은 휙 그어지는 원이 놀라운 듯 눈을 떼지 못한다. 디오게네스는 이 모든 광경이 지루한 듯 계단에 비스듬히 누워 햇빛을 받고 있다. "내가 당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소." 알렉산더 대왕의 말에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주십시오"라고 말했다는 사례가 떠오르는 모습이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를 플라톤의 모델로 했다. 선배 브라만테를 유클리드(혹은 아르키메데스)의 모델로 참고했다. 존경의 뜻이었다.
그런 라파엘로는 또 다른 한 명도 새겼다. 그림 중앙 아랫부분에는 한 사람이 계단에 앉아있다. 책상을 놓고 글을 쓰고 있다. 유심히 보면 이 사람 주변의 기운이 어색하다. 원근법도 잘 맞지 않고, 투시도로 보면 배치도 어딘가 좀 이상하다. 이 부분만 나중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다. 모델은 그 시절 라파엘로의 맞수, 미켈란젤로였다.
라파엘로는 왜 미켈란젤로를 나중에 덧붙였을까.
사연은 이렇다. 둘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특히 미켈란젤로가 라파엘로를 대놓고 싫어했다. 미켈란젤로 눈에 라파엘로는 곱상한 외모로 헛바람 든 어린애였다. 정적(政敵) 브라만테가 데려왔기에 더 정이 가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알게 모르게 라파엘로와 성품에서 비교도 당했다. "하늘은 예술을 정복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이 세상에 보냈지만, 예술뿐 아니라 예절도 다스리기 위해 라파엘로를 세상에 내보냈다. 라파엘로가 태어나기 전 예술가의 기질은 거칠거나 어리석고 광기조차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과거 예술가와 달리 미덕, 즉 예의, 근면, 겸손, 그리고 모든 부도덕과 결점을 상쇄할 만한 착한 성품을 간직했다." 실제로 예술가 겸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비슷한 시기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언젠가 미켈란젤로는 귀족 틈에 둘러싸인 라파엘로에게 "도련님처럼 찬미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를 가는가?"라며 놀렸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사형집행인처럼 혼자 어딜 가시나요?"라며 라파엘로가 재치 있게 받아쳤다는 설도 있다.
이런 와중에도 라파엘로는 알고 있었다.
그에게 등을 돌린 미켈란젤로에게도 레오나르도만큼 배우고, 훔칠 게 많이 있다는걸.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에 있던 시기,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에 오갔다. 그는 교황의 명령 같은 제안에 천지창조 등 천장화를 그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곧 일이 터졌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거듭되는 재촉에 기어코 성질을 부렸다. "제가 작업을 끝내는 날에 끝날 겁니다." 교황이고 뭐고 뭘 모르면 잠자코 있으라는 말이었다. 모욕감을 느낀 교황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등짝을 맞은 미켈란젤로는 화를 못 이기고 짐을 쌌다. 하던 일 전부 내팽개치고 로마 밖으로 가버렸다.
"우리, 시스티나 성당에서 구경이나 해보자고. 그 성질 더러운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말이야."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에게 신호를 줬다. 라파엘로가 고대하던 일이었다. 브라만테는 라파엘로를 데리고 시스티나 성당으로 갔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제작 과정을 모두 봤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미완성작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그가 알았다면 브라만테와 라파엘로 둘의 멱살을 함께 잡았을 터였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에 충격을 받았다. 라파엘로는 그 압도감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라파엘로는 이제 미켈란젤로의 능력을 쭉 빨아들였다. 얄밉도록 성실히 집어삼켰다.
미켈란젤로의 역작에 감격한 라파엘로는 곧 바티칸 궁으로 내달렸다.
인간은 꼬장꼬장하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자칭 조각가가 어떻게 저런 회화를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라파엘로는 뒤늦게 미켈란젤로를 '아테네 학당'에 그렸다. 당신을 레오나르도급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굳이 이 헤라클레이토스로 그린 건, 그 또한 미켈란젤로만큼 성질이 나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라파엘로는 이제 미켈란젤로의 장기까지 자유롭게 썼다.
레오나르도에게는 스푸마토 기법을 배웠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서펀틴 형상(근육의 디테일을 살린 인체 표현)을 훔쳐왔다. 1514년,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이 기법에 젖어들어 그린 그림이 '보르고의 화재'다. 교황 명령으로 장식한 방 중 '보르고 화재의 방'에 새긴 작품이다. 그림 속 남자와 아이들 몸에는 근육의 결이 명징하게 살아있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요동치는 핏줄까지 라파엘로의 손에서 빚어졌다. 우아한 그림, 동글동글한 작품을 즐겨 그리던 라파엘로는 이후부터도 더욱 진하고 강렬한 회화를 선보인다. "라파엘로를 보게. 이 예술가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고선 재빨리 페루지노의 수법을 버렸네. 이제 미켈란젤로의 수법을 열심히 모방하고 있어." 그런 라파엘로가 흐뭇했던 교황은 지인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소나기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라파엘로가 로마에 오고서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라파엘로는 예고 없던 비에 쫄딱 젖었다. 그가 물줄기를 피하고자 찾은 곳은 작은 빵집이었다. 그 안에 소녀가 있었다. 갓 구운 빵을 꺼내오고 있는 마르게리타 루티였다. 라파엘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챙 모자를 들고서 루티를 봤다. 밤처럼 검은 눈, 풍성하고 윤기나는 머릿결, 곧게 편 허리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루티의 얼굴은 곧 포도주처럼 붉어졌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사이 두 사람 틈에서 사랑의 종이 울렸다. 라파엘로가 테베레강을 지나던 중 우연히 멱을 감던 루티를 봤고, 곧장 첫눈에 반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둘의 나이 차는 12살로 추정된다. 10~17살 차이로 보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다른 사람과 약혼했다.
상대는 마리아 비비에나였다. 사실 라파엘로는 오래 전부터 교황청의 유력 인물인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에게 "내 조카와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추기경과 꽤 깊은 우정을 쌓았던 라파엘로는 마지못해 그 강요 같은 제의를 받아들였다. 라파엘로 입장에선 마리아가 훨씬 더 현실적인 상대였다. 마리아 뒤에는 돈과 권력이 있었다. 그의 명예로운 삶은 더 명예로워질 수 있었다. 반면 루티는 시에나 출신 빵집 주인 프란체스코의 딸이었다. 루티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롱과 비난만 받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라파엘로는 루티를 포기하지 못했다.
라파엘로는 마리아가 아닌 루티와 손을 잡았다. 마리아와의 결혼을 3~4년씩 늦췄다. 바쁘다는 말로 계속 버텼다. 1518년, 라파엘로는 결심한 듯 루티 앞에서 붓을 들었다. 라파엘로는 루티에게 터번을 올려줬다. 한 손으로는 가슴, 한 손으로는 다리 사이를 가리도록 했다. 정숙한 비너스,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의 자세였다. "그대로 있어줘. 나를 믿어." 라파엘로의 귓속말에 루티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라파엘로는 춤추듯 그림을 그렸다. 라파엘로는 루티 뒤에 은매화 나무를 그렸다. 비너스의 상징이었다. 모과나무도 함께 그렸다. 세속적 사랑의 상징이었다.
라파엘로는 막바지쯤에 붓질을 망설이는 듯했다.
그는 이내 마음을 굳힌 듯 다시 붓을 댔다. 루티의 왼손에 반지가 그려졌다. 루티의 팔에는 리본이 새겨졌다. 'RAPHAEL URBINAS(우르비노의 라파엘로)'. 라파엘로가 한 글자씩 또렷하게 박은 서명과 함께였다. 이는 루티를 향한 사랑의 맹세로 보인다. 그 다짐을 역사에 영원히 박제한 것이다. 그림은 관능적이다. 루티의 부드러운 곡선을 강조하고 있다. 얇고 투명한 베일은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라파엘로가 신화적 여성 말고 벗은 여성을 그림에 담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이 그림은 훗날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제빵사의 딸)'로 알려진다. 라파엘로는 루티를 성모 마리아, 성녀 세실리아, 바다의 요정 갈라테아 등의 모델로도 삼았다고 한다. 라파엘로에게 루티는 비밀의 연인이자 한껏 드러내고 싶은 뮤즈였다.
그 시절 라파엘로는 정신없이 바빴다.
라파엘로는 1514년에 죽은 브라만테 후계자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수석 건축가 일을 했다. 1515년에는 로마 고대 유물관리 책임자로 임명돼 또 일을 했다. 그런 라파엘로는 1518년, 라 포르나리나를 그릴 때쯤인 그 해부터 새로운 대작을 위해 매달렸다. 이스라엘 북부 타보르산(Har Tabor)에서 일어난 예수의 변용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산꼭대기에 선 예수가 강렬한 빛을 받는다. 바로 옆 모세와 엘리야가 이 현상을 직시하는 모습이다. 중간 부분에선 예수의 제자들이 경탄하고 있다. 아랫부분에는 세상 사람들의 갈등과 혼돈이 표현돼 있다. 종교개혁 바람을 막고 싶은 교황이 뜻은 이 그림에도 담겨있다. 자유로운 구도, 강렬한 색채, 연극이나 뮤지컬의 절정 부분 같은 역동성…. 고상하고 우아한, 그간의 르네상스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진하고 극적이다. 라파엘로는 '그리스도의 변용'을 통해 바로크 미술의 등장을 예고했다. 그는 르네상스 이후 어떤 시대가 도래할지 알고 있는 유일한 예술가였다.
라파엘로는 일을 하는 틈틈이 루티를 찾았다.
1520년 3월, 문제의 그날에도 라파엘로는 그녀와 만나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사랑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열병이 난 이유가 다른 게 아니고…."
의사는 뒤늦게 시종에게 전말을 들을 수 있었다. 절대 말하지 말고 절대 어디에도 기록하면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전해졌는지, 훗날 바사리는 "라파엘로의 과도한 애정 행각이 때 이른 죽음을 불렀다"고 썼다. 라파엘로는 루티와의 사랑 직후 열병에 시달렸다는 걸 왜 끝내 말하지 않았을까. 고결한 자로 불린 그가 미천한 빵집 딸과 불장난을 한 일은 명예에 누가 될 수 있었다. 또, 루티의 존재가 온 세상에 알려지면 그녀 또한 위험할 게 뻔했다. 루티는 천재를 홀린 마녀, 고결한 예술가를 갖고 논 악녀로 핍박받을 수 있었다.
라파엘로가 죽은 직후, 가장 아끼던 제자였던 줄리아 로마노가 스승의 작업실을 찾았다.
라파엘로가 다 못 그린 '그리스도의 변용' 마무리를 위해 그의 화구를 챙기러 왔다는 말이 있다. 로마노는 들어온 순간 한쪽 벽에 걸린 누드 초상화 한 점을 봤다. 분명 스승의 그림이었다. 그런데도 처음 보는 작품이었다. 로마노는 그림 속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종종 스승과 함께 있던 여인, 스승을 기쁘고도 슬픈 눈빛으로 봤던 여인, 둘의 관계를 알고도 애써 모른 척했던 루티였다. 로마노는 작품 속 루티가 오른손으로 가리키는 리본을 살펴봤다. 'RAPHAEL URBINAS'….
루티의 왼손에 끼워진 루비 반지도 봤다.
'스승님이 손꼽히는 부잣집과 약혼을 하고도 계속 독신으로 살고자 한 이유….' 로마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로마노는 스승 라파엘로와 루티가 비밀리에 약혼식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로마노 또한 그의 스승만큼이나 루티의 존재가 공공연히 알려지는 일을 두려워했다. 예술계가 발칵 뒤집힐 수 있었다. 로마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루비 반지를 홱 지워버렸다. 그렇게 이 반짝이는 장신구는 2001년 X-레이 투시 작업이 있기까지 500년간 물감에 파묻힌다.
라파엘로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열렸다.
보라색 옷을 입은 추기경 4명이 라파엘로의 시신을 들고, 교황이 그 차가워진 손에 입을 맞췄다고 한다. 현장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라파엘로는 모든 신에게 바쳐진 신전, 판테온에 묻혔다. 그는 끝까지 '화가들의 왕자'로 예우받았다. 라파엘로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여기는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만든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그와 함께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라파엘로가 천재들의 시대 속에서도 대체불가능한 자였음을 말해주는 문장이다.
한편 라파엘로가 죽은 후 루티는 어떻게 살았을까.
사랑을 잃은 루티는 남은 생을 라파엘로를 기리는 데 바치기로 했다. 루티는 라파엘로가 죽고 4개월 뒤 모든 것을 내버렸다. 판테온 옆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의 삶을 살았다. 루티는 끝내 슬픔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참고 자료〉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예경
크리스토프 퇴네스, 라파엘로, 마로니에북스
프레드 베랑스, 라파엘로 정신의 힘, 글항아리
김종성, 라파엘로가 사랑한 철학자들, 비제이퍼블릭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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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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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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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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