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심하다 큰코다친 美...김일성 생일에 美 정찰기 격추한 北[그해 오늘]
구식 전투기만 있던 동해 담당 비행장, 열차로 최신 전투기 이송 후 재조립
美, 전술 핵무기 사용 검토했으나 무위...美 헬리콥터 8월에 또 피격
北, 12월 美에 사과문 받아 낸 후 포로 송환
EC-121기는 최고 성능의 레이더를 갖고 있었기에 북한 전투기가 뜨면 먼저 발견하고 달아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 EC-121기는 얄미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생일인 4월 15일을 맞아 EC-121기를 격추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이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동해를 관할하는 북한 어랑 비행장에는 6.25 전쟁 때 활약한 구식 ‘MiG-15 전투기’밖에 없었다. 이 전투기는 속도가 느려 EC-121기를 격추할 수 없었다. 당시 어랑 비행장은 김책공군대학이 관할했는데, 김기옥 소장은 이 대학 학장으로 있었다. 김 소장은 평안남도 북창 비행장에 주둔해 있던 22연대의 MiG-21기 두 대를 어랑 비행장으로 옮기게 했다. 마하 2 정도의 속도를 가진 최신형 전투기 MiG-21기라면 미국의 EC-121기를 격추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북한은 미군 정찰을 피해 두 대의 MiG-21을 분해해 야간 열차 편으로 어랑 비행장으로 옮겼다. 그 후 대형 텐트를 쳐 그곳에서 MiG-21을 재조립했다. 김 소장은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을 기약하며 일주일 남짓 EC-121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4월 15일 EC-121이 예상한 항로로 날아온 것을 포착한 김 소장은 즉시 두 대의 MiG-21기를 이륙시켰다. EC-121기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도록 바다에 바짝 붙어 날아가는 초저공 비행을 펼쳤다. 그러다 갑자기 솟구쳐 올라 EC-121 쪽으로 돌진해 두 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오후 3시 55분 EC-121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함경북도 청진시 남동쪽 150km 해상으로 추락했고, 이곳에 탑승했던 승무원 31명은 전원 사망했다.
사건 발생 직후 미국 국방부는 소련, 중국, 쿠바 등에서의 정찰 비행을 일시 중단했다. 이와 함께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인 USS 엔터프라이즈를 비롯 40척의 함정으로 구성된 71 기동함대를 동해에 진입시켜 원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판문점에서 290차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미국의 응징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 닉슨 행정부는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보복을 검토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시기라 이 같은 생각은 단순히 검토에 그치고 말았다.
북한이 이처럼 미국에 대해 대담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이 사건 1년 전에 이뤄진 미국 군함 피랍 사건에서 비롯된 자신감이었다. 1968년 1월 23일 미국 해군 소속 정찰함 USS 푸에블로호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돼 83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푸에블로함 피랍 사건(Pueblo Incident)’이 바로 그것이었다. 북한은 이 사건이 마무리된 지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미국의 정찰기를 격추한 데 이어, 4개월 뒤엔 또다시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미군 헬리콥터(OH-23)를 떨어뜨렸다. OH-23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 3명은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됐는데, 같은 해 12월 3일 미국은 북한이 요구하는 대로 사과문에 서명을 하고 나서야 미군 병사를 데려갈 수 있었다.
이연호 (dew9012@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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