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발242중’ ‘죽음의 숙녀’ 두 영웅의 후예, 러시아 저격하다

2023. 4. 1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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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우크라이나 저격부대의 전설과 진실 〈상〉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톡톡히 전과를 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저격부대의 창설과 훈련에 공헌을 한 전설적 저격수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AFP=연합뉴스]
많은 도덕론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그렇게 순리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평화롭지도 않았다. 역사의 첫 장을 펼치자마자 우리는 인류 사회가 정복 전쟁으로 얼룩진 것을 보게 된다. “평화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평화롭다, 평화롭다!”(『예레미아서』 6:14)고 말한다. 전쟁의 원인만 봐도 어이가 없다. 이탈리아의 포도주가 맛있어서 로마로 쳐들어간 갈리아족의 전쟁(B.C. 4세기), 정치인이 심심해서 일으킨 전쟁(『8월의 포성』), 축구 시합에서 졌다고 화풀이로 일으킨 남미의 전쟁(1969) 등 어이없는 전쟁이 잦았다. 그럼에도 전쟁의 원초적인 원인은 영토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수많은 변명과 명분에도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떳떳하거나 선명하지 않았고, 평화에 대한 소망과 외침에도 전쟁은 줄어들지 않았다.

독·러 ‘저격병 저격하는 부대’ 창설

유사 이래 지구상에는 1만4500회의 전쟁이 있었고 36억 명이 죽었다.(육군사관학교 온창일)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순간은 모두 합쳐도 230년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현재까지 지구상에서 전쟁의 총성이 멎었던 순간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기록(국방대 황병무)을 보건대, 이제 소망으로서의 평화에 대한 기대보다는 현실로서의 전쟁이 더 절박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제 전쟁은 삼인칭이 아니며 일상화되었다.

당장 우리는 우크라이나전쟁 앞에서 도덕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보며 전율하고 있다. 전쟁의 전개 과정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작전(전략·전술), 실전, 무기와 보급, 사기, 정보, 의무(醫務), 통신, 민병대 등 전쟁은 이제 종합 과학이 되었다. 참으로 가혹한 말이지만 어떤 국가에서는 전쟁 때 경제가 호황을 탄다. 이번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톡톡히 전과를 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 저격부대의 창설과 훈련에 공헌을 한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중앙포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이겠지만, 우리가 잊고 모르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 저격학교(U-Scout Sniper School)의 전통과 현실이다. 비공식적으로 흘러나오는 정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저격병에 희생된 러시아의 사단장이 13명이고 장성이 20명이 넘는다. 영관급은 추산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두 명의 신화가 된 영웅이 있다. 한 명은 바실리 자이체프(Vasilii Zaizev, 1915-1991)다. 그는 그 시대의 국적으로 말하면 소련연방의 우크라니아공화국 국민이었다. 그는 본디 우랄산맥의 사냥꾼이었는데 2차 대전 당시 흑해함대 저격수로 발탁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군 242명을 저격했다. 사용한 총알은 모두 243발이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류드밀라 파블리첸코(Lyudmila Pavlichenko , 1916-1974)인데 키이우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는 156㎝의 작은 키에 키이우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한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는 키이우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병기창 직공으로 학비를 번 것이 인연이 되어 총잡이가 되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도 당연히 징집되어 간호병이 되었으나 그의 경력을 보이면서 저격병이 되기를 자원했다. 의아했던 모병 장교는 그의 능력을 보고서야 저격부대에 배속했다.

파블리첸코가 저격병에 응모한 것은 사랑하는 남편이 독일군에 사살된 원한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오뎃사 전투(1940)에서 187명을 저격한 것을 시작으로 세바스토폴 전투(1944)에서 대공을 세웠는데 그가 복무 중에 저격한 독일군은 모두 309명이었다. 그가 교전 중에 사살한 적군의 숫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로써 그는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성이 저격병으로 활약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총의 무게를 감당할 체력만 되면 여성이 더 섬세하기 때문이다.

자이체프와 파블리첸코는 종전과 더불어 우크라이나 저격학교의 교관이 되었으며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 국민이 되어 여생을 마쳤다. 현재 우크라이나 저격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독일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적대 국가가 된 뒤로 양국에서는 ‘저격병을 저격하는 부대’를 창설했다. 저격병들은 늘 신변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그들의 소재나 훈련장이 어디인지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도 키이우 육군사관학교 영내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 확실하지는 않다. 저격병들은 출전할 때 수류탄을 소지하는데 이는 자폭용이다. 저격병에 대한 적군의 가혹행위는 일반 포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복수심과 잔혹함으로 유명하다.

콘크리트 벽 너머 적군까지 사살

참호 속에서 러시아 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우크라이나 저격병들. 우크라이나 남부 헤르손 지역에서 지난해 11월 촬영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저격병은 훌륭한 사수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저격병은 초인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갖춰야 한다. 시력은 새삼 이야기할 것도 없다. 기온, 풍향과 풍속, 강우량을 포함한 습도, 기압, 안개의 농도, 구름에 의한 태양의 밝기와 방향, 탄적(彈迹)이 그리는 포물선의 각도(5.45도), 적과 자신과의 거리를 목측(目測)하는 능력을 동물적 육감으로 갖추어야 한다.〈https:www.theregister.co.uk 참조〉 기온이 영상 36도와 영하 36도의 연교차 72도를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가져야 한다. 저격병의 육체적 극한 상황은 허기와 졸음을 견디는 힘이다. 군장은 총을 제외하고 대체로 20㎏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 있다. 지구의 자전 방향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1,660km/h이며, 따라서 음속의 1.35배이다. 지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기 때문에 바람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분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 발을 밟고 있는 저격수와 허공을 나는 총알의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쏠 경우에는 총알이 미세하게 오른쪽으로 휘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쏠 경우에는 왼쪽으로 휜다.

그와는 달리 동쪽에서 서쪽으로 쏠 경우에는 공기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속도가 떨어지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쏠 경우에는 속도가 빨라진다. 서울에서 뉴욕을 가는 제트기가 14간 걸리는데 뉴욕에서 서울 오는 시간은 15.5시간임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쏘든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쏘려면 어찌해야 하나. 아, 그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저격병의 무기로 예전에 주로 사용된 것은 벨기에의 나강 형제(H. E. & M. E. Nagant)가 만든 모신-나강(Mosin-Nagant)이다. 세계적으로 소총은 벨기에와 체코제가 우수하다. 한국 독립군이 볼셰비키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도 체코였다. 근대 이전에는 일본의 무라타(村田) 소총도 명성을 얻었다. 소련제 베르당(Berdin) 소총은 러시아의 단발 소총으로 유명하여 대한제국 군대의 공식 무기가 되었었다. 대포는 독일의 크루프(Krupp)를 치며 기관총은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회전식 탄창의 개틀링(Gatling)을 친다.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군을 섬멸한 바로 그 무기이다.

모신-나강 소총은 나강 형제가 특허권을 소련에 넘겨 소련군의 주력 무기가 되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저격부대가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이 총은 노리쇄 단발식이었는데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주력 무기로 사용한 바로 그 단발총이었다. 한국인들은 이를 흔히 ‘아시보 소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아식 보소총(俄式 步小銃), 다시 말해 ‘아라사(Russia) 보병의 소총’이라는 명칭의 발음이 변형된 것이다.

한국전쟁 세대는 ‘따콩총’이라고도 기억한다. 월남전에서 베트콩의 저격부대가 쓴 총도 이것이다. 지금은 저격의 거리가 훨씬 더 멀어졌기 때문에 총신도 바뀌었고, 12.7㎜의 기관총용 탄환을 쓴다. 지금의 저격수들은 콘크리트 벽 너머에 숨은 적군도 사살한다. 적외선 열감지기 망원 렌즈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북한의 지도자도 걱정이 깊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편으로 계속됩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한국 근현대 정치사는 물론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정치사와 정치사상사를 폭넓게 연구했으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한국정치사』와 『한국분단사 연구: 1943-1953』등 방대한 저서를 내고 『군주론』 『외교론』 등을 번역했으며 최근 『삼국지』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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