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안주연의 래빗홀]
안녕을 말할 땐 천천히
모니크 폴락 지금·윤경선 옮김창비
|264쪽|1만2000원
“주말을 보내는 가장 별로인 방법 아닐까! 상실 치유 모임이라니….”
언젠가부터 삐딱한 농담만 하는 열네 살 애비는 차라리 축구를 하고 싶어하고, 과묵한 크리스토퍼는 이런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둘 다 이틀 동안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단상담, 미술작업, 보디워크 등의 활동을 통해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두 사람은 다른 이들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또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은 상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누군가를 ‘진짜 만나는’ 일에 관심이 있었는데요. 개발과 진행에 참여했던 ‘연결감 워크숍’을 통해 여러 사람이 심리적으로 안전한 토대 위에서 만나는 모임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활동 중에 표현되는 한 사람의 솔직한 생각과 감정은 참여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불씨로 작용하고,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지 않을 용기를 줍니다. 아마 우리가 함께 느끼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좋은 워크숍은 이 사실을 깊이 느끼게 해줍니다.
저널리스트이기도 한 모니크 폴락은 몬트리올 상실 치유 모임에 대한 이야기와 구급대원의 감정 문제를 다룬 이야기, 이렇게 본인의 특집기사 두 편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엄마를 잃은 애비와 구급대원인 아버지가 떠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크리스토퍼, 동생을 떠나보낸 앙투안이 표현하는 상실의 감정들은 매우 생생합니다. 모임에 끼어앉아 조용히 위로하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요.
다행스럽게도 모임에는 사별을 소화하지 못해 오래 힘들었던 경험을 가진 상담사 유진 선생님이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마치 다른 행성으로 추방당한 듯한 느낌”이라고 털어놓고, 앙투안은 “네, 상실의 별이죠”라고 답합니다. 저는 모임 사람들이 왜 ‘상실의 별에 갇혔다’는 표현을 쓰는지 알 것 같습니다. 상실을 겪는 사람은 그 부재에 압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얼어붙기도 하고, 그리움, 슬픔, 우울, 분노, 죄책감 같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다가와 고립되는데, 세상은 이들에게 슬퍼하되 집착하지 말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훌훌 털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유진 선생님은 치유의 과정을 설명하며 잘라 말합니다.
“기한이 없어요. 우리가 느끼는 상실의 슬픔은 저마다 다 다르니까요.”
“애도하는 과정은 살아가면서 계속 일어납니다. 극복이란 없어요.”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는 롤랑 바르트의 책 <애도 일기> 속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경감되지 않고,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씁니다. 그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이 엄마를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문득 자각하게 되는 순간을 두려워합니다. 바르트는 슬픔을 복기하기 위해, 망각하지 않기 위해 씁니다.
남겨진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도 현실이고, 우리 또한 언젠가 죽는 것도 진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죽음 뒤에 이제는 잊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마음도, 이제부터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도는 힘들고 외로운 것이기에, 제안합니다.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조바심내지 않도록 말입니다. 치유 모임에서는 충분히 서로를 알게 된 후에, 옆자리 친구의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활동을 합니다. “애비의 엄마는 심장병에 걸렸는데, 이식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라는 크리스토퍼의 이야기를 들으며, 애비는 신기하게도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저는 이 부분이 좋았습니다. 아픔을 가진 사람이 자신만의 고통에서 벗어나 누군가의 삶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이 그의 소중한 사람을 이야기하고 기억하는 방식인 것이 좋았습니다. 애도와 슬픔도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삶의 진실과 취약성을 나눌 때, 우리는 가장 깊게 연결되니까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변의 상실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임 마지막에 애비가 엄마에게 쓴 편지의 구절들은 함께 읽고 싶습니다.
“엄마,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한두 시간씩 엄마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어요. 그렇다고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에요. 엄마가 계속 그리울 거예요. (…) 내가 치유 모임에서 배운 것은 누군가를 계속 그리워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건 그 사람을 무척 많이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는 뜻이니까요.”
상실의 행성에서 살고 있지만 누군가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서로에게 관대하기를, 그리고 그 슬픔과 고독의 힘으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남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우리는 함께 슬픔을 치유하는 방법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습니다”라고 작가의 말을 마칩니다. 저는 이 문장들이 참 좋았습니다. 이 글을 읽는 것이 당신에게 좋은 일이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일들이 많이 있는 4월이면 좋겠습니다.
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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