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게 자유 안긴 ‘미니스커트 혁명가’ 메리 퀀트 별세

최보윤 기자 2023. 4.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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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미니스커트·핫팬츠 유행시킨 英 디자이너

그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여성들은 적어도 세 가지 자유를 빼앗겼을 것이다. 우선 치마를 입고 마음대로 뛰어다닐 자유. 둘째는 핸드백 없이도 편히 외출할 자유. 마지막으로 화장한 고운 얼굴로 마음껏 눈물 흘릴 자유다.

영국 패션 디자이너 메리 퀀트의 1970년대 모습./ap연합뉴스

‘미니스커트’를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주인공이자 ‘패션 혁명가’라는 문구가 누구보다도 더 잘 어울리는 영국 출신 디자이너 메리 퀀트(93)가 세상을 떠났다. 13일(현지 시각) 영국 BBC는 퀀트 가족의 성명을 인용하며 “퀀트가 이날 오전 영국 남부 서리의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사인 등 구체적인 정보는 전해지지 않았다.

퀀트의 치마 이야기에 언뜻 고개를 갸웃할 수 있다. 남녀 불문 입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딱 붙는 바지보다 펑퍼짐한 치마가 얼마나 활동하기 편한지. 하지만 불과 20세기 초반만 해도 여성에게 의복이란 마치 커튼을 두른 듯 거추장스럽게 무겁고 치렁치렁한 복장만 허용됐다. 그 치맛단을 무릎 위로 싹둑 잘라내 버렸으니, 치맛자락으로 바닥을 쓸며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퀀트의 혁명은 ‘주머니’로 이어진다. 옷에 깊은 주머니를 달아 손을 자유롭게 했다. 20세기 초반까지 여자들에게 주머니란 건 속옷에 달려 있는 일종의 복주머니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옷에 주머니가 생기면서 핸드백을 들지 않고도 ‘외출’할 수 있게 됐다. 여성의 사회 생활이 훨씬 편해졌다는 얘기다.

영국 패션 디자이너 메리 퀀트가 지난 1966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대영제국훈장을 받은 뒤 취재진 앞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AP 연합뉴스

패션에 이어 화장품까지 개발한 그녀는 방수 마스카라를 발명했다.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숯처럼 칠했다가 눈물이든, 빗물이든, 수영장에서든 물에 번져서 판다 얼굴처럼 되어 버린 경험이 있다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실연당한 뒤 마스카라 범벅이 된 검은 눈물을 더는 흘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요즘은 성별 구분을 일부러 두지 않으니, 그녀 덕분에 인류는 여러 구속에서 해방된 셈이다.

1930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퀀트는 6살 때부터 침대보를 잘라 옷을 만들 정도로 패션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디자인을 정식으로 전공하지 않았지만 디자인의 정의를 누구보다도 잘 꿰뚫고 있었다. 부모의 강한 반대 때문에 패션 대신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한 그녀는 자신의 성격과 똑 닮은 옷을 내놓았다. ‘편한 의상’과 ‘자유’에 방점을 뒀다.

1955년 런던 킹스로드에 ‘바자’라는 매장을 연 뒤 독특한 디자인의 의상을 선보이면서 젊은 층을 끌어모았다. 가게 앞에는 연일 사람들이 몰려 요즘 말로 하면 이른바 ‘오픈 런’의 시대를 연 셈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고급 쿠튀리에르(맞춤복 디자이너)가 세계 패션계를 휘어잡을 당시, 그녀는 기계를 사용한 기성복을 제작하고 값싸고 활동하기 편한 원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패션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모두가 입을 수 있는 옷”이 그녀가 표방한 디자인 정신. 그 공로로 1966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훈장(OBE)을 받았다.

그녀는 1967년 미국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극단적인(extreme) 패션은 매우 저렴해야 한다”면서 “젊은이들만이 대담한 옷을 입을 수 있고, 젊은이들에겐 극단적인 의상이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이 시대에 기계가 아닌 손으로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드라마틱한 패션을 추구한다면서 끝 모르게 가격을 올리는 고급 패션계를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국내에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킨 가수 윤복희.

미니스커트에 이어 바지를 짧게 잘라 핫팬츠도 유행시켰다. 발랄함을 더하기 위해 스타킹에 색을 입혔다. 집에서나 신었던 굽이 없는 신발(플랫 슈즈)에 각종 큐빅 등을 박아 파티용으로 바꿔놨다. 밤새 춤을 춰도 힘들지 않았다. 배우 오드리 헵번, 브리짓 바르도, 그룹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등이 그녀의 팬을 자처했다. 미국에선 ‘패션계의 비틀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국내엔 가수 윤복희를 통해 미니스커트 패션이 유행했다 .

사실 ‘미니스커트 혁명가’라고 불리지만 미니스커트를 가장 먼저 탄생시킨 이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하지만 ‘미니스커트’라는 용어를 만들고, 이를 대중화시킨 것은 메리 퀀트다. 그녀가 치맛단을 짧게 할수록 여성의 지위는 올라갔다. 그녀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규칙은 스스로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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