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면] 물건의 변신
동네 화가 형님이 화실을 대청소한다기에 도와주러 갔다가 원목으로 된 바둑판, 쌍골죽으로 만든 갈라진 대금, 수묵화를 그린 쥘부채 등을 얻어왔다. 바둑판은 두께가 한 뼘 이상은 족히 되는 데다 장롱처럼 발도 달려 묵직했다. 쌍골죽 대금도 나름 귀한 것이다. 좌우가 골짜기처럼 파인 모양의 대나무를 그늘에서 오래 잘 말려야 만들 수 있는 악기다. 하지만 소리를 가둬야 할 단단한 몸이 작은 균열로 인해 못 쓰게 되었다.
무늬가 절반은 지워지고 찌든 때가 덕지덕지한 바둑판은 샌딩기로 갈고 사포로 문질렀더니 안에 있는 목재가 드러나 완전히 신선해졌다. 바니시를 칠해 말렸더니 반질반질한 게 너무 마음에 든다. 요즘 어딜 가서 이런 귀한 두꺼운 원목을 얻겠는가. 이로써 내 방의 다육이들이 살 곳을 얻었다. 오늘부터 바둑판은 '다육의 언덕'이다. 원래 바둑판 발을 감싸고 있던 천은 때가 찌들어 무척 더러웠지만, 물로 깨끗이 세척한 다음 잘 말려서 다시 감싸주었다. 여기에 올라가는 다육이들이 이 바둑판만큼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쌍골죽 대금은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식물 걸개가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양쪽 끝에 드릴로 구멍을 뚫어 흰 벽에 단단히 고정시킨 후 작은 식물 몇 개를 늘어뜨렸다. 식물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오래된 물건과 만난 식물은 더욱 제대로 된 분위기를 낸다.
1년 전부터 키우기 시작하던 육지거북이 몸집이 두 배로 커졌다. 원래 거북이들을 데려왔을 때는 집이 유리로 되어 내부 온도 조절이 되는 폐쇄형 사육기였다. 그런데 내 눈에는 너무 답답해 보였다. 저건 죽지 않기 위한 장치이지 살아가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그래서 물고기를 키우는 위가 터진 넓은 수조를 사서 옮겨준 바 있다.
이제 그 수조도 얘네가 돌아다니기엔 너무 좁아졌다. 두 마리라 먹이라도 주면 서로 머리를 밟고 올라서고 자유자재로 유턴도 안 되는 상황이라 새로운 집이 시급했다. 쇼핑몰을 뒤져봤지만 대형 거북이 집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넷 영상들을 찾아보니 직접 제작하는 게 대세였다.
거북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숍에서는 매장 바닥 한편을 넓게 비워 벽돌을 쌓고 나무판을 대어 아주 근사하고 튼튼한 집을 만들었다. 가정집에선 이렇게 할 수 없으니 나는 어디서 나무 목재라도 사와서 그 절반만 하게라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목공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생각이 미친 게 못 쓰는 책장이다. 책장 칸막이를 없애고 눕히면 그보다 훌륭한 거북이 집이 있을까 싶었다.
당장 일에 착수했다. 얼마 전 이사를 했던 터라 높이 2m, 폭 1m 정도 책장을 못 버리고 쌓아둔 게 두 개가 있었다. 다만 눕혀보니 책장 뒷면이 바닥으로 가야 하는데 이 부분의 합판이 너무 얇아서 불안했다. 그런데 어떡해야 할까 고민도 하기 전에 문제가 해결되었다. 원래 책장에 칸막이들을 뒷면 바닥에 이어 대주면 되었던 것이다. 버려지는 것 하나 없이 위치 이동으로 해결이다. 드릴이 춤을 추고 뚝딱뚝딱 금방 거북이 집이 완성되었다. 중요한 건 나무인지라 습기에 대항할 수 있는 바니시 마감이다. 바니시를 세 번 정도 칠해주었다. 거북이가 매일 오줌을 싸도 전혀 스며들 수 없게 철통같은 방비를 갖춘 다음 분갈이용 흙을 깔고 그 위에 바크 몇 포대를 사다가 덮어주니 두툼하고 푹신한 거북이 달리기용 트랙이 생겨났다. 직전에 쓰던 수조보다 네 배 이상 더 커진 공간이니 아무리 빨리 자라는 대형종 거북이라지만 몇 년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듯하다.
10년 키운 벤자민나무가 지난겨울 얼어죽어 며칠 전 화분을 비웠다. 거기서 어른 장딴지만 한 뿌리가 나와 버리지 않고 다듬은 다음 한쪽에서 잘 말리고 있다. 속을 파내 배 모양의 용기로 만들어 볼 생각이다. 이건 벤자민에 대한 위로다.
쓰임새를 다한 물건의 새로운 쓰임새, 가능성이 다한 자리에서 생겨난 새로운 가능성은 나름의 즐거움과 위로를 준다. 물건도 이럴진대 사람은 어떻겠는가. 나이 들어 인생의 반전을 이룬 이들이 느끼는 기쁨은 어떨지 궁금하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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