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객열전] 40대 중반 도전자 이영주

정완주 기자 2023. 4. 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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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연봉 포기하고 선택한 PBA
바다 건너 이라크에서 온 늦깎이 선수
프로당구 선수 이영주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당구를 사랑하는 팬이라고 해도 이영주(46) 선수는 낯선 인물이다. 40대 중반의 나이지만 30대 후반의 나이에 대한당구연맹 선수 생활을 시작한 전형적인 늦깎이 선수 중 한 명이다. 연맹을 포함해 PBA로 넘어와서도 뚜렷한 성적을 아직 거두지 못했다. 이영주가 무명 선수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그는 지금도 생계를 걱정할 만큼 선수 생활이 팍팍하다. 안정된 연봉이 보장된 이라크 재건 현장의 관리직을 때려치우고 큐를 잡았지만 후회는 없다. 개인 투어 128강전에서 최강자 중 한 명인 조재호(NH농협카드) 선수를 승부치기 끝에 꺾은 후 가장 중요한 자신감을 얻었다. 얼핏 프로의 세계는 화려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냉엄하고 혹독하다. 무명의 이영주는 현실의 장벽을 깨고 지금부터 도약을 꿈꾼다.

휴가 나왔다가 트라이아웃 참가
결국 이라크행 대신 1부 진출

나이 40세를 이르는 불혹(不惑). 세상일에 휘둘리거나 판단을 흐리지 않을 나이를 이르는 말이다.

이영주는 불혹을 겨우 넘긴 42세에 인생을 좌우할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안정된 연봉의 일자리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가시밭길을 가야 하느냐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발단은 이렇다. 그는 대한당구연맹 소속 선수로 등록했지만, 주업은 건설 현장의 도색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구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탓이다.

"마침 괜찮은 일자리가 들어왔어요. 이라크 재건사업에 국내 대기업들이 참여했는데 도색을 담당한 하청 회사의 인력관리자 업무였죠. 연봉도 꽤 높은 편이었고 최소 2년은 보장을 받은 자리라 곧장 이라크로 넘어갔습니다."

물론 고민은 깊었다. 선수로 활동했지만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데다 슬럼프까지 길게 이어지던 상황이었다. 생업인 페인트공 일을 하다 보면 외진 현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 큐를 잡기도 힘들었다.

마음은 당장 바다를 건너 이라크로 가고 싶었지만, 당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에 머뭇거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생활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라크행을 결심했다. PBA가 출범하기 직전인 2018년이었다.

프로당구 선수 이영주가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무덥고 뜨거운 사막 지대에서의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업무가 적성에 맞았고 회사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만큼 적응에도 문제가 없었다. 이듬해 4월에 달콤한 휴가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PBA 출범 첫 트라이아웃(선수 선발전)이 열리는 기간이었다.

"휴가를 나올 때만 해도 트라이아웃이 그 기간에 열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친분이 있는 구민수 선수가 휴가 나온 김에 나가보라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당연히 시큰둥했죠. 이라크에 나가 있는 동안 큐를 잡지 않아 훈련도 못했고 실전 감각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트라이아웃 통과가 아니라도 PBA 선수로 등록이나 하는 셈 치자는 권유에 떠밀려 며칠 연습을 한 뒤 결국 참가하게 된 겁니다."

의도하지 않게 뛰어든 트라이아웃에서 조별리그는 무난히 통과했다. 하지만 결선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패해 2차전까지 밀려났다. 2차 토너먼트에서는 4연승을 달리다가 마지막 경기에서 고비를 만났다.

"현창화 선수와의 경기였는데 제가 앞선 상태에서 2점만 치면 승리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기면 다음 날 3차전을 치러야 하는데 이라크로 복귀하는 날이거든요.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3차전에 나가야 할지, 그러면 이라크 직장을 포기해야 할지 갈등이 온 거죠. 결국 경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비겨서 승부치기까지 갔다가 져버렸어요."

탈락의 위기를 구해준 것은 와일드카드였다. 마지막 경기 탈락자 중에서 상위권 선수에게 와일드카드가 주어지는데 무승부가 최우선 기준이었다. 현창화와의 경기가 비긴 경기여서 우여곡절 끝에 이영주는 와일드카드를 받아 극적으로 1부 투어 진출이 확정됐다.

기쁨도 잠시, 마지막 선택이 남았다. 당장 이라크로 돌아가지 않으면 현장 업무는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PBA 출범 첫 1부 프로선수의 자격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하는 와중에 트라이아웃에 임하는 선수들의 간절함과 절박함이 떠올랐습니다. 그 많은 선수들이 염원하는 1부 프로선수 자격을 내가 내던진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더라고요.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흔들렸지만, 과감하게 도전을 결심한 거죠. 회사 선배에게 전화했더니 엄청난 욕만 먹었고 결국 이라크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습니다."

긴 공백기로 적응에 어려움 겪어
40대 중반에도 고민하는 생계

프로선수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선 긴 공백기가 문제였다. 부족한 훈련과 잃어버린 경기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과제였다. 무게가 달라진 공인구는 물론, 예전보다 탄력이 있는 당구대의 쿠션 반발력 적응도 쉽지만은 않았다. 40초가 아닌 30초 이내에 공격하는 새로운 PBA 규칙도 장벽이었다.

"경기력을 안정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죠. 게다가 렌즈를 착용했는데 오히려 부작용 때문에 더 어려움을 겪었어요. 이런저런 악재가 겹치다 보니 결국 이듬해 2부 리그로 밀려났습니다."

프로당구 선수 이영주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2부 리그 생활은 한 마디로 애매했다. 성적이 바닥권을 기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큐스쿨을 치를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다.

"애매한 게 문제였죠. 성적이 하락해 3부까지 떨어지면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포기할 수도 있었다고 봐요. 나이도 40대 중반을 넘어섰으니까요. 그런데 30위권을 오르내리면서 꾸준하게 큐스쿨을 통과해 살아남으니 당구를 접을 수도 없는 상황이 이어진 거죠."

이영주는 여전히 생계를 고민하면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젊은 시절의 연장선이다.

그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꼬임(?)으로 당구를 시작했다. 친구들의 권유에도 당구에는 관심이 없어 당구장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친구들이 '겁나서 당구장을 안 가냐'라고 놀리더라고요. 그냥 흥미가 없었을 뿐인데 자꾸 그런 놀림을 당하니까 반발심에 당구장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1년이 채 안 돼 4구 수지로 300점을 쳤어요. 다른 친구들에 비해 금방 실력이 늘었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칩을 놓고 치는 당구를 즐겼어요. 칩을 따면서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좋아하는 당구를 칠 수 있다는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다. 하는 일도 없이 종일 당구장에서만 죽치고 있는 선배들의 모습이 갑자기 자신의 미래로 투영되는 듯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군대에 가 자연스럽게 당구를 끊게 됐죠. 부사관으로 4년 3개월 정도 근무를 한 기간은 물론이고 제대 후에도 큐를 잡지 않았습니다. 당시 PC방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오히려 게임만 즐겼어요."

이영주가 다시 당구를 시작했을 때는 서른 살을 넘겨서부터다. 대대전용 클럽이 생겨나면서 진중하고 건전한 당구 문화가 자리를 잡을 무렵이었다. 그는 김재근(크라운해태) 선수가 운영하는 클럽에 가서 처음으로 국제식 대대를 접했다.

"국제식 대대를 접하자마자 그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됐어요. 예전의 왁자지껄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손님들이 진지하게 당구에 몰두하는 분위기가 좋았고요. 그때부터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당구장의 바뀐 문화가 큐를 다시 잡은 계기가 된 셈이죠."

당시만 해도 그는 당구 선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색 관련 업무의 특성상 지방 곳곳을 전전했던 탓이다. 꾸준한 연습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인데 대회 일정을 소화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저 취미로 즐기는 수준에서 만족했다.

프로당구 선수 이영주가 스포츠한국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하지만 당구에 대한 재능이 남다른 편이었는지 주변에서는 계속 선수 활동을 권유했다. 결국 이영주도 생업에 얽매이지 않는 선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2016년 안양에서 선수로 등록했다.

'슈퍼맨' 조재호 꺾고 자신감 얻어
1부 리그 복귀 성공..."마지막 기회"

이영주는 2023~2024시즌부터 1부 투어에 다시 합류한다.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도전인 만큼 오랫동안 살아남는 것이 목표다.

생계는 여전히 걸림돌이다. 주요 수입은 레슨이고 하루 이틀 정도의 현장 아르바이트 자리가 나면 틈날 때마다 일을 나간다.

"과거의 페인트 관련 일은 지금도 꾸준히 의뢰가 들어오긴 합니다. 이라크 일을 연결해 준 선배가 지금도 가끔 연락이 오지만 현실적으로 받을 수가 없죠. 중간중간 시합을 나가야 하는데 그런 조건을 받아줄 회사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어렵더라도 당구에만 매달립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도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아마 그때 가서야 당구를 포기하고 다른 생업을 찾지 않을까 싶네요. 1부 선수 중에서도 최하위권 몇몇 선수는 아예 수입이 없거나 대회 참가를 위한 숙박비마저 부담이 되는 선수가 많을 정도로 쉽지 않은 환경이긴 합니다."

그는 1부 투어로 다시 복귀하는 다음 시즌을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는 배수진을 치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한 체력 훈련도 그 일환이다.

"그동안 헬스를 통해 체력을 강화하는 훈련도 병행했는데 집중력이 좋아지면서 성적도 올라갔습니다. 최근 한두 달 여러모로 힘이 좀 들어서 운동을 중단하니까 연습 게임을 해도 집중력이 좀 흐트러진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다시 체력 훈련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영주는 2022년 10월 4차 투어인 '휴온스 PBA-LPBA 챔피언십' 128강에서 '슈퍼맨' 조재호를 승부치기 끝에 물리치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번 시즌의 남다른 각오도 조재호와의 일전이 전환점이 됐다.

"자신감을 찾았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물입니다. 조재호 선수와 붙었을 때도 긴장감보다는 실수를 줄이고 나만의 당구를 구현하자고 다짐했는데 그 결과가 승리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자신감이 붙게 된 거죠."

정완주 기자 wjchung12@hankooki.com    

프로당구 선수 이영주가 스포츠한국과의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혜영 기자 lhy@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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