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갔을 때 알았죠, ‘가족 같은 사이’의 한계”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이런 물음 앞에 머뭇거리는 이들이 있다. 머릿속에서 잠시 적절한 표현을 골라야 한다. “친구요”, “애인이요”, “동거인이요”, “동반자인데요”라고 답하면 이런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가족은 아니네요?”
가족처럼 살아가지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원가족보다 끈끈한 정서적 유대감을 기반으로 돌봄을 주고받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가 법으로 정의한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 테두리 밖의 관계는 ‘비정상’으로 낙인찍히고 차별받는다. 가족이 받는 각종 사회보장 지원에서도 배제된다. 배우자·혈족이 아닌 사람과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비혼, 노인, 청년, 성소수자, 장애인, 한부모, 미혼부모 등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관계를 추궁받는다. 관공서에 가도, 병원에 가도, 어딜 가도 그렇다. 가족의 틀 안에 편입돼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무슨 관계인가요?’라는 질문은 ‘사회적인 질문’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대답 또한 개인이 아닌 사회가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회적 강요’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선택하기도 한다. 아예 결혼을 생각지도 못하는 이들은 사정이 더 곤란하다. 전통적인 가족 개념으로 범주화할 수 없는 관계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한 체감이 아니다. 각종 통계와 인식조사 등에서도 확인된다. 법과 제도는 그러나 경직돼 있다.
최근 ‘생활동반자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법은 가족 외의 관계에도 가족처럼 각종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활동반자법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구현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다양한 관계의 확장을 위한 논의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순남 대표는 “생활동반자법은 이성 배우자와 혈연 중심의 가족제도를 깨나가는 데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일각에선 극단적인 제도라고 말하지만 사회 흐름은 더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가족에게만 허용된 권리 A씨(32)와 B씨(37)는 수년간 연애를 했고 최근 1년 동안 동거를 했다. 이성 커플이지만 결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결혼제도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굳이 결혼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일상을 함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생활동반자법이 생기면 동반자로 신고하기로 약속했다.
어느 날 새벽 A씨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료검사를 위해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B씨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A씨는 “애인이 옆에서 나를 계속 간호했지만 법적 가족이 아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력감과 한계를 절감했다”고 털어놨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벽에 부딪혔다. 새로운 전세대출이 필요했는데,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한 상품은 이율이 훨씬 낮았다. 아이가 있으면 대출기간 연장 등의 추가 혜택도 있었다. A씨는 “청년들이 독립해 전·월세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결국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국가가 특정 연령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도록 유도한다는 걸 느꼈다”고 했다.
둘은 결국 결혼해 법적 가족이 됐다. 현실 앞에서 신념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혼인 외에 일상을 나누는 관계들은 복지혜택 등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온전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합쳐진 묶음’(가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많은 이가 실생활을 공유하며 상호의존하지만,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각종 권리 밖에 놓여 있다. 돌봄 등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는 가족에 맞춰 설계돼 있다. 혼인-출산-육아-노후 등 생애주기마다 가족이 있어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다. 가족구성권연구소가 2019년 11월 기준 현행 법률 1400여개를 분석한 결과 240여개 법률에 ‘가족’이라는 단어가 담겨 있었다.
A씨의 사례처럼 법적으로 엮이지 않은 관계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대표적인 현장이 바로 병원이다. 배우자·혈족 등 가족이 아니면 의료결정권을 대신할 수 없다. 생명이 달린 문제여서 관계의 형태와 무관하게 모두가 불안감을 겪는 문제다.
특히 건강 위험성이 높은 노년층에서는 대안의 필요성이 두드러진다. 연명치료 결정권도 가족만이 가진다. 애도할 권리도 마찬가지다. 시신을 인수하고 장례를 치를 권리는 사실상 가족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최근 장사법이 개정돼 오는 9월부터 친분관계를 맺은 사람 등도 장례를 주관할 수 있게 됐지만, 무연고 사망자에게만 적용된다. 고현종 노년유니온 사무처장(59)은 “멀리 사는 가족보다 가까이 사는 이웃을 더 가족같이 여기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례를 못 치르고 수술 동의를 할 수 없는 건 문제”라며 가족 범위가 확장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또 가족이 아니면 유족 자격이 인정되지 않아 국민연금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 등에 근거한 각종 보상금·보험금·연금 등을 수령할 수 없다. 주택임대차 승계권도 제한된다. 사망자 명의로 전세계약을 맺었다면 동거인은 거처를 잃게 된다.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 남은 노인들이 재혼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를 꺼리는 분위기라고 한다. 재혼을 하면 자녀들에게 돌아가는 상속분이 줄어들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성인을 입양하기도 동거를 원하는 이들에게 주거공간은 필수적이다. 주거는 관계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장치이고 삶의 질과도 직결된다. 그러나 청약 등 주거정책은 법적 가족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신혼부부, 다자녀, 노부모 부양 등이 유리하다. 주택 구입이나 전세 대출 등 주택금융상품도 가족이어야 이점이 있다. 가족이 아니면 공동대출이 불가능하다. 공공임대·공공분양주택도 비혼 동거 관계를 위한 몫은 없다.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해 5~6월 ‘뚝딱뚝딱, 가족 법·제도·문화를 다시 짓다’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와 집담회에는 여러 증언이 나왔다. 한 응답자는 “주택과 관련한 신혼부부 대출, 특별공급, 청약가점의 대상이 아니어서 주택 마련은 꿈도 못 꾼다”며 “공공임대주택을 신청하려고 해도 1인 가구로 인정돼 같이 살 공간이 없다”고 했다. 다른 응답자는 “주택을 구입하려 했는데 공동명의 대출은 안 된다고 했다”라며 “법률혼 부부라면 두 명의 합산 소득으로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 있지만, 법적 가족이 아니라 한 명의 소득만을 기준으로 대출 가능 금액이 산정돼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다”고 말했다.
소득공제 인적공제 대상과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도 가족 외에는 이름을 올릴 수 없다. 또 가족돌봄휴가·휴직, 출산휴가, 육아휴직 등도 가족에게만 주어진다. 병역법상 간병을 위한 분할복무도 가족이 아플 때만 가능하다.
법적 가족이 되기 위해 성인 두 명이 입양을 선택한 사례도 있다. 비혼 여성 C씨(44)와 D씨(39)는 2016년 처음 알게 된 이후 마음이 맞아 이듬해부터 살림을 합쳤다. 둘은 서로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등 가족과 다름없이 지냈다. C씨가 병원에 갈 일이 잦아지면서 급박한 수술 등 ‘만약의 상황’이 닥쳤을 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노후를 대비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지난해 5월 나이가 많은 C씨가 D씨를 입양했다. 이는 동성의 남남인 두 사람이 법적 가족으로 묶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입양을 신고하고 하루 만에 가족관계등록부에는 두 사람이 엄마와 딸로 등재됐다. C씨는 서면 인터뷰에서 생활동반자법이 있었다면 입양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함께 살며 힘이 되는 존재에게 가족으로서의 권리·의무를 갖게 하는 건 국가를 위해서도, 개인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법·제도가 대응 못 해 다양한 관계의 출현과 인식 변화는 수치로도 파악할 수 있다. 통계청의 2022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남녀가 결혼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응답이 65.2%로 집계됐다. 2012년 45.9%에서 꾸준히 증가세가 이어졌다.
여성가족부가 2021년 6월 발간한 ‘가족 다양성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를 봐도 변화의 양상은 뚜렷했다. ‘혼인·혈연 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주거 공유 관계이면 가족이 될 수 있다’에 61.7%가 동의했다. ‘거주·생계를 공유하지 않아도 정서적 유대를 가진 친밀한 관계이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의견에 45.3%가 긍정했다. 동의 비율은 2019년 38.2%에서 계속 증가했다. 반면 ‘법적인 혼인·혈연으로 연결돼야만 가족이다’ 항목에는 동의 51.1%, 비동의 48.9%로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 다만 동의 비중이 2019년 67.3%에서 가파르게 하락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응답자 10명 중 7명(71.2%)은 ‘사회 법·제도가 다양한 가족이 새롭게 등장하는 변화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비친족 가구도 확연한 증가세를 보인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을 통해 확인한 2021년 비친족 가구는 47만2660가구다.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많은 수치다. 이 가운데 2인 가구가 42만738가구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3인 가구는 3만7935가구, 4인은 1만116가구, 5인은 3871가구 등으로 조사됐다. 2015년 20만 가구대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해 2020년에 40만 가구를 넘어섰다. 가구원 수도 2021년 101만5100명을 기록했다. 2015년은 47만1859명으로 6년 동안 2배 이상 뛴 것이다.
정의당·기본소득당 조만간 발의, 민주당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 생활동반자법이 약 9년 만에 다시 국회에서 추진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4년 당시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생활동반자 관계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했지만 실제 발의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이번엔 정의당과 기본소득당이 각각 작성한 법안을 조만간 발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정당의 생활동반자법은 기존 진선미 의원의 법안을 뼈대로 한다. 2014년 당시 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초안이 공개됐다. 법안은 생활동반자 관계를 정의하고 성립·해소의 요건과 절차를 규정한다. 생활동반자는 성인 2명이 합의하면 형성된다. 결혼했거나 다른 생활동반자 관계에 있으면 안 된다. 기본적으로 혼인과 비교해 자유롭게 맺을 수 있는 느슨한 관계다.
생활동반자는 동거, 부양, 협조의 의무를 지닌다. 이는 각종 사회보장이나 세제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한다. 일상 가사대리권, 가사로 인한 채무의 연대 책임도 있다. 혼인에 준하는 권리와 의무다. 생활비용은 공동으로 부담한다. 재산 관계는 사전에 약정을 체결할 수 있다. 신분의 변동은 없다. 상대방의 가족과 인척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상속권도 없다. 혼인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관계의 해소는 두 사람이 합의하거나 한쪽이 해소를 원할 때 가능하다. 이혼에 비해 절차가 간소하다. 관계를 해소할 때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고 상대방의 과실이 있다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권리 보장은 개별법 개정을 통해 이뤄진다. 진선미 의원은 2014년 당시 생활동반자법과 함께 부속 개정안 7~8개를 마련했다. 대표적으로 소득세법(소득세 인적공제), 국민건강보험법(피부양자 적용), 의료법(의료기록 열람권), 가정폭력처벌특별법(피해자의 대리인 역할) 등이다.
현재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준비하는 생활동반자법안 내용도 대체로 유사하다. 다만 용 의원은 권리보장 범위를 보다 확장했다. 생활동반자법 부칙에 개정이 필요한 개별법 20여개를 포함시킬 방침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생활동반자 사이에서 동거 의무를 제외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 용 의원과 마찬가지로 부칙에 10개가량의 개별법 개정 사항을 담을 예정이다. 민법상 가족 개념을 삭제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생활동반자법의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우리도 생활동반자제도 도입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라고 밝힌 바 있다. 이후 공식적인 추가 언행은 없었다.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고 보는 일부 의원들이 물밑에서 개별적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수준의 움직임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생활동반자법은 파장이 크기 때문에 개별 의원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 차원에서 논의가 돼야 할 것”이라며 “지도부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생활동반자법이 발의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면 어느 수준에서 권리와 의무를 부여할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또 두 명을 넘어 세 명 이상이 친밀한 가족생활을 하는 관계는 어떻게 정의하고 지원을 할지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여론의 지지를 받아 보수세력의 반발을 넘어야 한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2월 24일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기독교계 등의 보수단체들은 “생활동반자제도가 시작되면 동성결혼도 합법화된다”라며 “건강한 혼인, 가족제도를 파괴하고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악법 중의 악법”이라고 주장했다.
해외에선 오래전부터 시행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4월 국회의장에게 생활동반자법 제정 등을 권고했다. 인권위는 “가족의 상황·형태로 인한 차별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이유를 밝혔다. 또 “현행 제도의 미비가 소위 ‘정상가족’ 이외의 가족 형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낳는 원인이 된다. 이 때문에 인식개선을 위한 수단으로도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인권위는 특히 “법안이 시행되면 전통적 가족이 붕괴하고 가족의 순기능이 사라져 사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반박했다. 인권위는 “해외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근거가 희박하다”라며 “제도권 밖의 사람들을 제도 안으로 포섭해 정책적 지원을 가능케 함으로써 사회적 안정과 통합을 증진시킨다”고 강조했다.
프랑스는 1999년 시민연대계약(PACS) 제도를 도입했다. 성별과 무관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독일과 영국 등에서도 유사한 제도를 시행 중이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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