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두바이에서 마주한 ‘서울대 병원’…이 편안함을 어찌 표현하리[다른 삶]
‘K의료 우수성’ 알리는 병원
“두바이에도 서울대학교 병원이 있다고? 세상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마침내 화색이 돌았다. 10여년 전 그곳에서 뇌 수술을 받고 건강한 일상을 되찾은 엄마에게 서울대학교 병원은 이름만으로도 베드로의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 믿음직한 곳에서 딸이 수술을 한다니 무엇보다 기쁜 이야기였으리라.
정확히 말하자면 두바이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라스알카이마(Ras Al Kahimah)라는 토호국의 셰이크 칼리파 병원(Sheikh Khalifa Special Hospital)을 서울대학교 병원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 200명이 넘는 한국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다국적 의료진 1000명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3차 병원이다. 서거한 셰이크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전 UAE 대통령에 의해 설립된 이 왕립병원은 UAE에서 가장 혁신적인 병원에 선정되는 등 K의료의 우수성을 알리는 선봉에 있는 병원이기도 하다. 참고로 라스알카이마에 사는 GCC 국적의 사람들에게는 병원비가 무료이다.
3개월 전,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부정 출혈이 지속되자 불안한 마음에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다. 아부다비에 오기 전 그러니 정확히 2년 전에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건강검진을 모조리 하고 나왔기에 나름 건강에 대한 자부심은 있었다. “100점 만점에 98점의 건강 상태이니 이대로 관리만 잘해서 다녀오라”는 칭찬까지 받았는데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라고 생각했던 건 젊은 날의 자만이었을까. 차갑고 낯선 병원 대기실에 앉아 지난 2년간 겪었던 혹독한 날씨와 예상치도 못했던 사건·사고에 발을 동동 굴렀던 순간들이 괜스레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혜임’에서 ‘하이예임’이 되어버린 내 이름을 듣고 들어간 진료실에서 아랍계 의사 선생님은 수술 이야기를 꺼냈다.
출혈의 원인은 폴립으로 추정되며 현재 상태를 봐서는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아주 간단한 수술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용기가 생긴 나는 ‘용종 하나 떼는 건데 뭐’라며 수술 동의서에 모조리 사인을 하고 수술 날짜까지 잡고 나왔다 .
UAE 왕립 ‘셰이크 칼리파 병원’엔
한국 의사·간호사 등 1000명 근무
3개월 전 동네 병원에서 수술 권유
과잉처방 의혹에 서울대 병원 예약
입구서 병원 마크 보니 고국 온 듯
장거리 운전 피로마저 사르르 녹아
마음 편히 진료 받고 수술도 성공
우리의 뛰어난 의료 시스템 ‘뿌듯’
다음날 아이들 등굣길에서 만난 현지인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수술 이야기를 꺼냈는데 친구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나를 멈춰 세우더니 “병원 몇 군데 가봤어?”를 시작으로 오목조목 취조하기 시작했다. 한 군데 가봤다고 하자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여기서는 최소한 세 군데를 가봐야 한다” “수술은 수술이니 제발 다시 생각해라” 등을 반복했다. 차라리 한국에 잠깐 돌아가서 검사를 받고 오는 게 어떠냐며 겁을 주는 것 아닌가. UAE의 의료 환경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높은 수준이지만 불필요한 수술을 권유하거나 과잉 처방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귀 얇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는 ‘그래도 수술인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마취에서 못 깨어나면 어쩌지?’ ‘의사소통이 잘 안 되면 어쩌지?’ 등의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찾아간 두 번째 병원에서의 진료 결과는 신기하게도 친구의 예언처럼 첫 번째 병원과 첨예하게 갈렸다. 눈을 씻고 봐도 폴립을 찾을 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은 장기간의 호르몬 치료를 권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와 한국행 항공권을 검색하며 궁리를 해보아도 당장은 아이들 학교를 무단결석시키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신사임당의 피가 흐르는 K엄마에게 학교 결석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결국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운영하는 셰이크 칼리파 병원으로 진료의뢰서를 보내보았다. 그곳은 두바이에서야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이지만 내가 사는 아부다비에서는 편도 두 시간 반이 걸리는 위치에 있다. 평일에 진료를 봐야 하니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왕복 다섯 시간 동안 사막 사이로 뚫린 고속도로를 횡단해야 하는 초장거리 병원행이다. 하지만 9시간이 걸리는 한국행에 비하면 양반이기에 진료의뢰서가 채택되기만을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그리고 원하던 전화가 왔다.
라스알카이마는 생소한 이름의 도시이지만 UAE에서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5성급 호텔이 줄지어 있고 두바이보다 물가가 저렴해 올인클루시브 호캉스(호텔 바캉스) 장소로 인기가 많다. 지근거리에는 아름다운 사막의 풍광을 배경으로 하는 리츠칼튼의 최고급 사막 호텔도 동시에 만나볼 수 있고 UAE의 가장 높은 돌산인 제벨 자이스에서 무려 2.8㎞의 집라인을 타고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니 새로운 경험을 갈구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이런 아름다운 곳으로 떠나는 길이었지만 한 시간 이상 차를 타면 멀미를 하며 토하는 두 딸을 데리고 성치 않은 몸으로 운전대를 잡은 이 상황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부다비에서 두바이로 이어진 고속도로를 달려 두바이의 눈부신 스카이라인을 지나자 아름다운 오렌지빛 능선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모래언덕을 산책하는 낙타 떼와 하얀 얼굴에 까만 몸뚱이의 이국적인 염소 떼가 나타나자 아이들은 멀미도 잊고 환호성을 질렀다.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을까. 라스알카이마에 다가갈수록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여행을 온 듯한 기분 좋은 설렘이 찾아왔다. 병원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서있는 등대처럼 주황빛 모래사막이 펼쳐진 언덕 위에 홀로 서있었다. 도로 곳곳에는 짙은 갈색의 질퍽하게 뭉개진 그것, 바로 낙타들의 분변이 널려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곳에 병원이 있구나’라며 입구에 다다르자 마주한 서울대학교 병원 마크를 보니 고국에라도 돌아간 기분에 괜스레 마음이 웅장해졌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셨네요”라는 우리말로 따스하게 맞이해주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 장거리 운전의 피로가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수술 날짜를 잡고 다시 한번 라스알카이마를 찾게 되었다.
한국인 의사 선생님에게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부모님처럼 기뻐한 건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이었다. 직장을 찾아 아부다비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이다 보니 얼굴 자주 마주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가족이나 다름없다. 꼬박 몇 년을 매일같이 아이들 등하교 때마다 만나니 서로의 대소사를 속속들이 알게 되곤 한다. 이직과 전근이 잦아 만남만큼 이별이 많은 이방인 커뮤니티이지만 신기하게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묻거나 따지지 않고 먼저 손길을 내밀어주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며칠간 아이들을 봐주겠다고 하거나 하다못해 장이라도 봐다줄 테니 필요한 건 말만 하라는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들 덕분에 고향을 그리는 외로운 마음을 다독이며 살게 된다.
두 번째 라스알카이마 방문과 함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인 의료진의 꼼꼼한 안내와 따스한 보살핌 덕에 마음 편하게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점이라면 수술 후 바로 퇴원하는 터라 마취가 덜 깬 몽롱한 상태로 마중 나온 가족들을 만났다는 것이랄까. 그 모습에 놀란 가족들의 정성 어린 간호 덕분에 아부다비 생활 2년 만에 꿀 같은 휴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뿐이랴. 친구들에게 받은 유기농 대추야자 선물과 근사한 식사 대접까지 따라왔으니 오히려 호강에 겨워 지냈다. 나의 수술 무용담에 쏟아지는 질문 세례 중 으뜸은 ‘혹시 그 병원에 보톡스 잘 놓는 한국 의사 선생님은 없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사는 이곳 아부다비에도 한국 병원이 자리를 잡아서 우리 의사들의 뛰어난 기술력과 손재주뿐 아니라 체계적인 의료 시스템이 뻗어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한국 배우들처럼 실크 같은 피부를 갖고 싶다는 나의 아부다비 친구들이 한국 ‘의느님’의 은혜를 받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조혜임
국내외 기업에서 커뮤니케이터로 일했다. 현재는 남편, 쌍둥이 딸과 아랍에미리트연합에 거주하며 현지의 일상을 글과 그림에 담아 소셜 플랫폼에 연재하고 있다.
조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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