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5. "다람쥐야 떫은맛을 잊었느냐"

최동열 2023. 4. 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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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산에서 인공의 맛에 길들여진 다람쥐가 등산객이 손을 내밀자 스스럼없이 올라선다.

■사람과 친해지는 다람쥐-야생성 잃어

등산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많은 야생동물을 만나게 된다. 늦가을 바위 암릉에서는 월동을 위해 독을 잔뜩 품은 독사를 만나 저도 놀라고, 나도 놀라 식은땀을 흘려야 할 때도 있고, 인적 드문 깊은 산에서 부스럭거리는 멧돼지를 발견, 숨을 죽여야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등산 중에 야생동물 때문에 불상사를 당하는 일은 거의 없다. 뱀을 만나는 것은 산행 중에 종종 있는 일이기에 처음에는 소스라치게 놀라다가도 익숙해지면 긴장의 정도가 한층 줄어들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산에는 지리산 등에 방사한 곰이나 야생 맷돼지 등을 제외하면 맹수라고 할 만한 야생동물이 아예 없고, 또 야생동물이 먼저 등산객을 공격하는 일도 거의 없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산에서 가장 친숙한 야생 생명체는 다람쥐다. 인기척에 달아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개중에는 재롱을 부리듯 등산객에게 다가서는 놈들도 적지 않다.

▲ 삼척 쉰움산-두타산 능선에서 만나게 되는 쉼터 명소.

얼마 전 설악산 봉정암을 등산할 때다. 인제 백담사에서 출발하면, 완만하게 고도를 끌어올리면서 편도 10.6km에 달하는 기나긴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봉정암을 약 500m 남겨둔 지점에서 마지막 고비인 ‘깔딱고개’와 마주치게 된다. 비탈길이 500여m쯤 되니까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파른 급경사로인 만큼 등산객들은 대부분 깔딱고개 아래에서 한숨을 돌리고 쉬면서 고갯길을 치고 올라갈 체력을 가다듬게 된다.

숨을 고르며 쉬어갈 요량으로 고개 아래 빈터에 자리를 잡고 배낭에서 요깃거리를 꺼내 먹고 있는데, 눈 앞에 뭐가 자꾸 어른거린다. 가만히 보니 다람쥐 두세 마리가 주변을 빙빙 돌면서 떠나지 않는다. 숫제 옆으로 다가와 등산화를 건드리는 놈도 있다.

▲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백두대간 곤신봉∼선자령 능선의 봄 풍경.

“어 이놈들 봐라”하는 마음에 손을 내밀자 다람쥐가 손바닥 위에 냉큼 올라 선다. 해발 1000m 이상 고지대인 설악산 깊디깊은 심산유곡에 사는 다람쥐가 사람 손바닥에 스스럼없이 올라서다니. 훈련받지도 않은 다람쥐의 이런 행동은 인간과 동물이 유별한 자연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요즘 산에서는 이렇게 사람과 친숙한 다람쥐를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전국 어느 산이든, 산행 중에 쉼터를 찾아 잠시 쉬면서 요기라도 할라치면, 배낭에서 미처 요깃거리를 꺼내기도 전에 다람쥐 서너 마리가 먼저 나타나 주변을 맴도는 것이 보통이다.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자꾸 먹을 것을 던져주는데 길들여진 때문이다. 야생의 세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과자 부스러기 등의 인공 먹거리가 무한 제공되면서 다람쥐가 ‘가축화’되고 있다면 이해가 될까. 달콤한 맛에 익숙해진 다람쥐들은 등산객의 배낭에서 매혹적인 먹을거리가 나온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등산객들에게 다가서게 됐고, 급기야는 서커스장의 원숭이처럼 사람 손에 올라서는 기이한 행동까지 하게 된 것이다.

▲ 백두대간 곤신봉에서 만나게 되는 야생화(얼레지).

■달콤한 인공의 유혹-야생의 비정상화

사시사철 전국의 등산로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금, 등산 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야생동물들에게 던져지는 인공의 먹거리도 더욱 많아지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유명 등산로 주변에 사는 다람쥐들은 야생의 먹이활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로 인해 다람쥐가 도토리의 떫은맛을 아예 잊어버렸다면 그게 정상일까. 귀엽다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달콤한 맛에 길들여진 다람쥐는 궁극에는 야생성을 잃을 것이고, 그것은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설악산 깊은 산속의 동물조차도 사람이 먹이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은 일종의 야생의 파괴다.

▲ 설악산 봉정암의 고개마루.

지난 3월 소백산에서 자연방사한 붉은여우가 550여km를 홀로 이동해 강릉에 나타났을 때, 취재차 통화한 국립공원 야생생물보전원 중부보전센터 관계자는 “먹이를 주지 말라”고 했다. 애써 자연복원을 시도하고 있는 여우가 인간이 제공하는 먹이로 인해 야생성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이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요즘 유명산 등산로에는 유난히 도토리가 많다. 지난해 가을에도 동해시 무릉계곡 등산을 하던 중에 굵고 탐스러운 도토리가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에 홀려 산행은 뒤로 미루고 도토리 줍기에 열중한 기억도 있다. 다람쥐가 떫은 맛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이렇게 많은 도토리가 산길에 뒹구는 것은 아닌지, 다람쥐가 사람과 친해지니 별 걱정이 다 생긴다.

▲ 악산 대청∼중청 능선에서 바라본 설악의 진경. 속초시내와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달콤한 유혹에 길들여지면 기어코 문제가 생기고 만다는 것을 등산객들에 의해 깊은 산에서 가축화되고 있는 다람쥐를 통해 새삼 실감한다. 물론 한겨울 폭설기에 먹을 것이 없는 야생동물에게 그들의 먹잇감을 제공하는 먹이주기 행사는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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