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 유출보다 ‘정보 수집 방법 노출’에 더 충격받은 워싱턴
(시사저널=김현 뉴스1 워싱턴 특파원)
미국 정부의 도청 기밀문건 유출 파문이 계속 확산되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각종 기밀이 담긴 문건이 온라인에 유출된 보안 사고가 발생한 것은 물론 유출된 문건에 담긴 정보와 정보 수집 방법 등이 공개된 것에 대해 곤혹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최소 100쪽짜리 유출 문건에는 대부분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다. 유출된 문건은 국가안보국(NSA)과 중앙정보국(CIA), 국방정보국(DIA), 국가정찰국(NRO)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준비된 브리핑 문서와 슬라이드 사진들이다.
해당 문건은 미 국방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문건은 게이머들에게 인기 있는 채팅 플랫폼인 '디스코드'에 2월28일(현지시간)과 3월2일 기밀문건들을 사진으로 찍은 형태로 각각 공유된 것으로 전해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기밀문건 유출이 당초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이른 올해 1월 이뤄졌고, 기밀들이 담긴 수백 건의 문건이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우선 기밀문건이 외부로 새어나간 것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문건 유출의 직접적 당사자인 미 국방부는 4월7일 법무부에 범죄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4월10일 브리핑에서 "이런 종류의 문서가 (유출돼) 공공 영역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일각에선 미국 정부 내 정보 공유의 보안성 문제도 지적된다.
미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이 같은 고도의 기밀정보 유출은 미국이 정부 내에서 안정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정보를 공유·전파할 수 있다고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이를 의식한 듯 미국 정부는 해당 문건에 접근할 수 있는 인원이 수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기밀문건 배포 및 접근을 축소하는 방안 등 보안 강화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황한 바이든 정부, 조기 수습에 주력
유출된 문건은 형식이 미 정부 내 보고용 문서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 미거 국방장관 공보담당 보좌관은 4월10일 취재진에 "유출된 문건 형식이 고위급 인사들에게 우크라이나·러시아와 관련한 최신 정보를 매일 제공할 때 사용되는 형식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문건 중 일부의 위조 가능성을 거론했다. 미국 내에선 현재 문건 유출자를 놓고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오고 있다.
해당 문건이 미국 정부 내에서 유출됐을 공산이 높은 만큼 바이든 행정부의 안보정책에 반대하는 미 안보기관 내 반체제 인사의 소행일 것이라는 관측과 기밀 접근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별다른 이유 없이 과시용으로 유포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선 러시아 정보기관의 과거 활동을 고려할 때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틀어지게 하기 위해 러시아 정보요원이 허위 정보 작전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 관련 문건을 게시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기밀문건이 외부로 유출된 것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문건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의 정보 수집 방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커비 조정관은 "미국을 수호하기 위해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정보 그 자체뿐만 아니라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CNN은 유출된 문건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 등에 대한 정보 수집 방법이 차단되거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해당 문건을 보면 미 정보기관이 러시아와 중국, 북한 등 적성국은 물론 한국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등 동맹 및 파트너 국가까지 도청 활동을 한 정황이 확인되고 있다. 특히 해당 문건에는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과 관련해 3월1일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 등 한국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들의 대화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문건에는 이 같은 내용이 미 정보기관의 신호정보(SIGINT·시긴트)를 통해 확보됐다고 적시돼 있다.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유출 문건 중 하나를 '3월1일자'라고 언급한 것과 한미 시차를 감안하면, 한국 대통령실의 대화 내용이 실시간으로 도청되고 있을 가능성도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 정부도 동맹국에 대한 도청 의혹이 불거진 데 대해 당혹해하는 기류를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가 전 세계를 도청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긴 하지만, 과거 동맹국들에 대해 도청을 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음에도 거짓말을 한 게 공개적으로 밝혀진 만큼 체면을 구기게 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잇단 논란에도 미국 정부가 적성국과 동맹국 모두를 상대로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국가 안보'다. 미 언론들도 미국이 동맹국까지 도청한다는 사실 자체에는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채 '외교적 논란' 가능성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국가 안보 차원에서 도청 등 정보 수집 활동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커비 조정관도 국가 수호를 강조하면서 "저는 모든 미국인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백악관 "도청, 모든 미국인은 이해할 것"
다만 미국 정부는 이번 사태가 동맹과의 신뢰에 금이 가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이를 해소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 정부는 기밀문건 유출 사태가 벌어진 이후 상당한 고위급 레벨에서 동맹들과 소통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스틴 장관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동맹 및 파트너들과 긴밀한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스틴 장관은 특히 한국시간으로 4월11일 이종섭 국방장관과 통화를 갖고 해당 의혹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4월말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조기 수습에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자칫 이번 사건이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2년 만에 이뤄지는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미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 미 인터넷 매체인 '악시오스'는 동맹국들도 일상적으로 서로 정보를 수집하기 때문에 한국 등의 국민들이 미국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진 않겠지만 이번 유출은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어색한 문제라며, 10년 만에 미 의회 연설을 앞두고 있는 윤 대통령이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이번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통해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간다면 이번 유출 파문으로 불거진 외교적 불협화음이 수그러들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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