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욱의 술기행](93)“섬세한 계절의 맛을 초록섬 술에 담았어요.”
2016년 전통주소믈리에 금상 수상…전통주연구소에서 7년간 연구원 활동
‘적당한 단맛과 튀지 않는 신맛의 조화’ 초록섬 탁주와 약주 출시 때부터 품귀 현상
“모든 술 원료가 흙에서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서두르지 않겠다”
“연잎으로 빚은 술, 초록섬은 연잎의 존재를 크게 드러내진 않지만, 곡물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신생 양조장 대표이지만, 가양주 빚기에선 오래 전부터 ‘은둔 고수’였던 조태경 대표의 술은 잘 계산된 개성을 보여준다. 비슷한 술이 기존 상업양조에선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백곰막걸리 이승훈 대표)
‘술 빚는 전통주 소믈리에’ 조태경 소믈리에가 드디어 서울 혜화동에 소규모 양조장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상업양조에 나섰다. 이름하여 양조장 ㅎ(히읗). 술을 빚는 모든 재료가 흙에서 나온다고 해서, 양조장 이름을 ‘히읗’으로 지었다니, 양조장 네이밍부터 예사롭지 않다.
조 대표는 2016년 정부가 주관하는 전통주 소믈리에 대회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한, ‘국가대표 전통주 소믈리에’다. 조 대표는 한국 최고의 전통주 교육기관인 한국전통주연구소(소장 박록담)에서 7년간 전통주를 배웠고, 또 전통주를 널리 알리는 일을 해왔다. 2년전부터는 요리연구가 황정아 쌤과 함께 전통주와 음식을 페어링해 내놓는 ‘월간요술상’ 식도락 이벤트도 매월 열고 있다.
예사롭지 않은 것은 양조장 이름만이 아니다. 조태경 대표가 작년 말에 첫 작품으로 내놓은 술 ‘초록섬’ 탁주(12도)와 약주(15도)가 전통주 매니아 사이에서 ‘핫한 신상 술’로 화제를 낳고 있다. 소규모 양조장이라 생산 양이 적은 탓이 크겠지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주점 대표, 술꾼들이 많아, 양조장 술 창고는 늘 바닥이다. 기자가 취재 차 양조장을 방문한 날에도 초록섬 약주는 없어 시음조차 하지 못했다.
전통주 홍보 플랫폼인 대동여주도의 이지민 대표 시음평은 보다 자세하다. 우선 초록섬 탁주다. “은은한 곡향과 함께 새콤한 향이 어우러져 차분히 퍼져나간다. 맛도 차분하다. 적당한 단맛과 튀지 않는 산미(신맛) 등이 조화를 이룬다. 매 모금이 부드럽고 우아하다. 혀 끝에 닿는 쌉싸래함이 매력적이다.”
이 대표는 초록섬 약주를 더 높이 평가했다. “(약주는)탁주의 향과 결을 같이 하지만, 향에서 숙성미, 깊이감이 더 느껴져서인지 더 편안하다. 적당한 단맛과 신맛, 쌉싸래함에 약간의 알코올감, 은은한 감칠맛이 더해져 전체적인 맛을 이루는데, 알코올 도수 15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술의 가장 큰 매력은 처음과 중간, 끝의 이어짐과 긴 여운, 맛의 강약이나 변화, 알코올의 튀는 감 없이 일관적으로 맛이 이어진다. 이 술의 후미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하는 찰나에 나도 모르게 다음 잔을 조용히 머금게 된다.”
첫 잔이 두번째 술잔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술, 양조인이라면 누구나 만들고 싶어하는 술 스타일이다. 조태경 대표 역시 이런 술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감사하게도 여러 분들이 제 술이 맛있다고들 칭찬해주세요. 사실, 첫 잔에 맛있는 술도 좋지만, 두번째가 더 맛있고, 세번째가 더 맛있는 그런 술을 만들고 싶어요. 뭔가 여운이 남는 술,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도는 그런 술요. 처음부터 맛있지 않아도,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아서 좀 편하게, 그리고 질리지 않는 술을 앞으로도 만들고 싶어요.”
전통주 전문가들의 호평이 쏟아지고 있는 초록섬 술은 과연 어떻게 만든 술일까? 초록섬 탁주와 약주는 밑술에 덧술을 한번 더한 이양주다. 밑술 재료는 멥쌀, 덧술은 찹쌀이다. 초록섬의 감칠 맛은 찹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밑술 재료로 들어가는 멥쌀 비중이 높아, 단맛이 과하지는 않다.
밑술은 멥쌀 통쌀죽으로 한다. 누룩은 송학곡자를 구해서 쓴다고 한다. 찹쌀은 고두밥으로 만들어 덧술로 쓴다. 밑술 만들고 나서 여름에는 3~4일, 겨울에는 거의 일주일 뒤에 덧술을 한다. 특이한 점은 연잎 끓인 물을 연잎과 함께 덧술에 넣는다는 사실. 말하자면, 초록섬은 연잎주다. 쌀 100%로 만드는 순곡주가 아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이 술에서 연잎 향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은은한 연잎향을 각인시키는 것은 오히려 병 라벨이다. 정인숙 사진작가의 연잎 사진을 초록섬 술 라벨로 사용했다. 정인숙 작가는 조태경 대표가 한국전통주연구소에 근무할 당시, 술을 배우러 온 인연이 있다. 초록섬은 여름에 담은 술과 가을-겨울에 담은 술의 라벨이 다르다. 같은 초록섬인데도 빚은 시기에 따라 다른 라벨을 사용하는 것도 남다르다.
여름에 담은 술, ‘초록섬 하’는 초록빛 연잎 사진이 라벨을 도배하고 있다. 연잎 중간에 이슬인 듯 물방울이 맺혀 있다. 겨울에 만든 술 ‘초록섬 겨울연밭’ 라벨은 온통 하얗다. 말라버린 연밭에 눈이 내린 모습이다. 같은 원료로 만들었지만, 술 빚은 시기가 다른 탓에, ‘초록섬 하’와 ‘초록섬 겨울연밭’의 미세한 맛 차이는 있겠지만, 술 마시는 이는 굳이 그 차이를 느끼려 애쓰지 않아도 좋다.
초록섬 탁주와 약주는 발효가 끝난 술을 거르는 과정에서 철저히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탁주는 면으로 만든 천 보자기에 넣어 술지게미를 거르고, 약주는 직접 용수를 박아, 맑은술을 떠낸다. 술을 거르는 전통 도구인 용수는 다 익은 술독 안에 박아 넣어서 맑은 술을 얻는데 사용하는 도구다. 가늘게 쪼갠 대나무나 싸리나무 같은 걸로 촘촘하게 엮어 둥글고 깊은 원통형 바구니 모양을 하고 있다. 요즘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술 거를 때, 용수 대신 자동 여과기를 이용한다. 용수를 박아 맑은술을 거르는 게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술 거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양조장 히읗 경우엔, 술 한독(35리터 용량)에 용수를 박아 맑은술을 거를 경우, 하루에 500ml~1l(리터) 정도만 뜰 수 있다고 한다. 술 서너 독에서 맑은술을 다 거르는데 거의 3주 내지 한달이 걸린다고 한다.
“전통주연구소에서 술을 배울 때 늘 약주는 용수를 박아 천천히 걸렀기 때문에 양조장을 차린 지금도 용수를 사용해요. 여과기 같은 현대식 장비는 해본 적이 없어요. 약주를 거르는데 걸리는 한달의 시간은 결국 약주를 숙성하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에, 이 시간을 줄일 생각은 안합니다.”
조 대표는 약주 숙성을 한달 정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한달 숙성’은 다른 양조장에 비해 기간이 긴 편이 아니다. 많게는 석달 이상 숙성에 공을 들이는 양조장도 적지 않다. 숙성이 오랠수록 술의 향과 맛이 깊어지면서 동시에 부드러워진다는 게 통설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한달밖에 숙성을 하지 않냐고?
“연구소에서 7년간 근무하면서 저온숙성을 1년 이상 하는 경우도 더러 봤는데, 술맛이 조금 부드러워지고 안정된 맛을 내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처음 그 술이 갖고 있는 본연의 싱그러움, 신선한 맛, 풋풋한 맛은 숙성을 오래 할수록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딱 한달 정도 숙성하면 오래 숙성에서 오는 깊은 맛은 조금 덜할 수는 있지만, 곡물 발효로 인한 과실 향이 많이 나는 매력이 있어요.
그래서 풋풋한 과실향을 내는 데는 오래 숙성하는 것보다는 한 달 정도 숙성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겠다고 판단했어요. 다소 술 향이 가볍게 느껴지더라도, 상큼함을 살리기 위해 오랜 숙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래 숙성하면 견과류 향이 나는데, 저는 견과류 향보다는 과실 향이 더 좋아 한달 정도만 숙성해요.”
양조장 히읗 조태경 대표 이력은 다채롭다. 대학에서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술과의 첫 인연은 와인수입사에서 시작했다. 와인수입사에서 일하다, 전통주 매력에 빠져 숙대 대학원(전통문화 식생활 석사과정)과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전통주를 배우고, 또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7년 정도 다닌 전통주연구소를 2020년에 나와서는 요리연구가인 황정아씨와 ‘월간 요술상’ 행사를 매달 하고 있다. 월간 요술상은 한달에 한번 테마를 정해, 전통주 소믈리에인 조태경 대표가 4~5종의 우리 술을 정하고, 또 그에 어울리는 음식을 황정아 요리연구가가 내놓는 식도락 행사다. 4월의 시음주는 싱글몰트 라거 맥주, 정쌍은 와인 레드 드라이(거창포도주), 이시보 막걸리, 해월 약주, 안동진맥소주다.
그렇다면, 가양주 빚기 분야에선, ‘재야의 고수’였던 조태경 대표는 왜 작년에야 본인의 양조장을 차렸을까? 우리나라 최고의 전통주 연구기관인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7년 동안 우리술을 직접 빚고 또, 빚는 걸 가르쳤던 그가 아니던가?
“2020년에 연구소를 그만 둘때만 해도, 양조장을 차릴 생각은 본격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술 빚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어떤 술이 시장에서 먹힐지 솔직히 몰랐거던요. 그런데 2년 정도 월간 요술상 행사를 진행하면서 전통주 시장의 트렌드를 나름 알게 됐어요. 또 제가 요술상 참석자들에게 내놓은 술들에 대한 소비자 반응을 즉각 알게 되는 것도 큰 도움이 됐고요. 아마, 연구소에서 배운 기본만 믿고 양조장을 차렸다면, 100% 망했을 겁니다. 연구소에서 배운 술 빚기 기본기를 바탕으로, 요술상 행사를 통해 체득한 전통주 시장 트렌드가 더해졌기 때문에 제 양조장을 낼 엄두를 낼 수 있다고 봐요.”
조 대표가 양조장을 차린 것은 작년 8월. 서울 혜화동로터리 인근의 작은 건물 한층을 구했다. 한층을 다 쓴다고는 하지만, 더 작은 양조장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공간은 협소하다. 그런데 왜 이름이 양조장 히읗일까?
“양조장 이름을 지으려고 고민하면서, ‘왜 내가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안겨주기를 바라는가’를 생각했어요. 우선 술의 기본 재료를 생각했어요. 쌀, 밀(누룩 원료), 연잎 등. 그 어떤 것도 흙에서 나지 않는게 없더라구요. ‘그래 흙에서 나는 것들로 술을 빚는 만큼 서두르지 않겠다, 천천히 가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더불어서 양조장에 오시는 분, 초록섬 술을 즐기는 한분 한분의 마음이 하하호호 기뻤으면 하는 바람도 있구요. 혜화로터리 부근에 양조장이 있어 혜화동 양조장이기도 하고. 그래서 흙, 하하호호, 혜화동 이 단어들의 첫 자음이 모두 히읗(ㅎ)이라서 양조장 이름도 히읗이라 지었어요.”
그의 첫 술 이름을 초록섬으로 정한 과정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제 술에 연잎을 사용하기 때문에 연잎의 색깔인 초록을 술 이름에 넣고 싶었어요. 거기에 섬을 덧붙인 것은, 섬에는 무언가 ‘자유’의 느낌이 있다고 생각해서이구요. 젊은 시절 인상깊게 봤던 영화 ‘그랑 블루’도 술 이름으로 생각했지만, ‘전통주 네이밍에 외국 영화제목은 아니다’는 주변의 만류도 있고 해서, 초록섬으로 최종 정했습니다.”
양조장을 차린 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양조장 히읗은 벌써 다음 작품을 개발 중이다. 초록섬에 이은 두번째 술은 송순주. 이른 봄에 새로 자라나는 소나무 새순을 이용한 송순주는 소나무에서 채취한 부재료로 빚은 술 중에서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초록섬 라벨 사진을 주신 정인숙 선생님과 무주에 함께 가서 송순을 채취하기로 했어요. 작년에 딴 송순으로 지난 2월에 술 한독 만들어놓기도 했고요. 올 여름쯤 내놓을 생각입니다. 여름에 빚은 초록섬 하(여름)와 겨울에 빚은 초록섬 겨울연밭도 그렇지만, 제 술은 모두 섬세한 계절의 맛을 담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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