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여성 주연 영화 100억 시대…영화계 변화의 시작
[SBS 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2023년 한국 영화계에서는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종전의 상업 영화들이 대부분 남자 배우, 남성 서사 중심이었다면 올해는 여자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여성 서사를 내세운 작품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저 '이름 있는 여성 캐릭터가 남자가 아닌 주제로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 것만으로도 벡델 테스트(Bechdel Test: 영화 성평등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웃픈 상황과 비교해 보면 여성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가 잇따라 제작되고 있는 건 고무적인 변화다. 특히 저예산 독립 영화가 아닌 예산 100억 원대 이상의 상업 영화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배우라는 직업에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고, 영화 속 주인공의 성비를 따지는 것이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영화계는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는 능력의 문제를 넘어 기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올해의 이 유의미한 변화와 시도들은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유령'부터 '밀수'까지…여배우가 이끄는 100억대 대작들
포문은 미스터리 액션극 '유령'이 열었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항일조직 '흑색단' 스파이들의 활동을 그린 작품으로 제작비 137억 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영화의 주연은 이하늬, 박소담이 맡았다. 100억 대 대작 영화에서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선 건 전지현의 '암살' 이후 첫 사례였다. 이 작품은 박차경, 안강옥이라는 두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액션 활극을 완성했다.
넷플릭스 영화 '정이'도 두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정이'는 지구를 떠난 인류가 수십 년간 내전을 겪는 상황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최고의 전투 인공지능(AI)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김현주가 타이틀롤인 정이로 분했고, 故 강수연은 전투 A.I 개발에 힘쓰는 연구팀장 윤서현으로 분했다. SF 장르인 이 작품에는 제작비 200억 원이 투입됐다.
'칸의 여왕' 전도연도 100억 대 규모의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활약했다. '불한당:나쁜 놈들의 세상', '킹메이커'를 만든 변성현 감독과 의기투합해 액션 영화 '길복순'을 완성했다.
여성판 '존 윅', 한국판 '킬 빌'을 표방한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전도연의 활용법이다. 묵직한 드라마 장르에서 빼어난 연기력을 뽐내왔던 전도연이 액션물에서 킬러로 활약한다. 지난 3월 31일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180개국에 공개됐다.
연간 최대의 관객이 몰리는 성수기인 7~8월 극장가에서도 여배우 투 톱의 대작을 만날 수 있다. 류승완 감독이 연출하고 김혜수, 염정아가 주연을 맡은 '밀수'가 개봉한다.
'밀수'는 1970년대 횡행했던 밀수 범죄에 두 해녀가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해양범죄활극이다. 제작비 175억 원을 투입했다. 류승완 감독이 여배우 투톱의 액션 영화를 만든 것은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이후 20여 년 만이다.
◆ "모성의 굴레를 벗어나"…서사·캐릭터에서 보이는 변화들
한국 영화에서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드물었던 것은 상업적 결과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이 낮다는 인식 때문이다. 극장을 찾은 핵심 관객층은 20~30대 여성이고, 이들이 선호하는 건 30~40대 남성 배우들이라는 논리가 투자사와 제작사에 만연해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인식이 데이터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애초가 시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통계를 낼 만한 표본도 적었다.
이는 한국 영화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 영화 산업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도 이 같은 현상은 두드러진다. 2018년 영화 '오션스 8'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가진 케이트 블란쳇은 "주연이 전부 여자로 꾸려진 영화가 왜 이제야 나왔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여성 앙상블은 팔리지 않는다는 게으르고 멍청한 생각을 하는 인간들 때문"이라고 일갈한 바 있다.
블란쳇이 말한 게으르고 멍청한 생각은 업계의 '선입견'이지만, 영화에서 여배우를 활용하는 게으른 아이디어와 서사도 분명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특히 한국 영화에서 30대 이상의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 대부분은 '엄마'다. 모성애를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가 상업성을 갖기는 쉽지 않다. 대체로 신파에 기댄다. 뻔한 역할, 진부한 이야기의 영화를 제안받는 여배우들은 동기 부여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양한 기회가 열려있는 드라마판으로 눈을 돌린다.
비교적 자본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독립 영화는 창작폭이 넓다. 모녀 사이를 통해 파탄된 관계와 파괴적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와 1960년대에 활동한 여성 감독 홍은원의 삶에서 모티브를 얻어 여성 영화인의 꿈과 열정을 그린 '오마주'(2022) 같은 작품들이 좋은 예다.
올해 선보였거나, 개봉을 앞둔 상업 영화들은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유령'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성을 극복한 두 여성 스파이를 전면에 내세워 미스터리 활극을 완성했고, '정이'는 모성애가 중심인 작품이기는 하지만 SF라는 장르색을 강화해 차별화를 시도했다.
'길복순'의 경우 배우의 서사가 영화의 서사에 반영된 흥미로운 사례다. 영화를 연출한 변성현 감독은 시나리오를 쓴 뒤 전도연을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전도연과 대화를 하고 난 후 이야기를 구상했다.
'칸의 여왕', '충무로 최고의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에 가려졌던 '엄마 전도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은 것.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모성'이라는 감정에 집중하는 영화는 아니다. 액션 장르로서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이고 그 중심에서 전도연이 활약한다.
'밀수' 역시 밀수가 횡행했던 1970년대 시대상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바다를 터전으로 활동하는 해녀들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쥔 핵심 캐릭터로 등장한다. 액션 장르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온 류승완 감독의 연출력과 김혜수, 염정아라는 충무로 대표 여배우들의 내공이 시너지를 낼 작품으로 기대를 모은다.
◆ 시도만으로는 안된다…상업적 성공에 거는 기대
"어떤 때는 한국에서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최근 '길복순'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받은 전도연은 미국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한국 영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대해 언급했다. 동시에 이 대답에서 과거 이 배우가 느꼈을 답답함과 막막함도 유추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도연은 몇몇 영화에서 자신의 그릇에 비해 한없이 작은 역할을 맡거나, 의미도 없이 소비되는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가 있었다.
국내 인터뷰에서 전도연은 당시 인터뷰에 대한 부연 설명을 했다. 전도연은 "OTT 영화 쪽의 변화지, 극장 영화는 여전히 제한적"이라고 전제했다. 실제로 여성 주연 영화의 기획 및 제작은 OTT 업계가 열려있는 편이다.
그러면서 150억 예산의 '길복순'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가졌던 마음가짐, 공개 이후 자신감을 얻었던 일화를 공개했다.
"변성현 감독이 '길복순'을 제안했을때 예산이 100억 넘는다고 해서 솔직히 좀 부담스러웠어요. 그런데 내 입으로 "전도연이면 투자가 안되잖아요?"라고 말하긴 싫었어요. 감독님에게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고 (나 대신) 젊은 친구랑 하셔도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이건 전도연을 놓고 쓰는 거고, 전도연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든 생각은 '내가 해낼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였어요. 그래서 '길복순'이 넷플릭스에 의해 투자가 되고 촬영이 들어갔을 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라고 생각했어요. 베를린영화제에서 영화가 처음으로 공개되고 외신의 호평이 나왔을 때 '거봐!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그건 제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한 말이기도 해요."
전도연은 그간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라고 누누이 말해왔다. 소박한 바람이지만 쉽지 않았다. 물론 배우에게 적은 대사가 있을지언정 작은 역할도, 작은 연기도 없다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 자체가 넓지 않다. 올해 몇몇 상업 영화들의 도전적 시도에 눈길이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업적, 비평적 성공에 거는 기대도 크다. '유령'은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아쉬운 결과를 얻었고, '정이'와 '길복순'은 넷플릭스 비영어 부문 전 세계 1위에 올랐지만 평가 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이 영화들의 성공과 실패가 표본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변화의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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