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전도연이 '길복순'에서 증명한 그의 가치는?

2023. 4. 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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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즐레] "무딘 칼이 더 아파요"


(SBS연예뉴스 김지혜 기자)

배우 전도연은 애써 자신을 높이거나, 굳이 자신을 낮추려 하지 않는다. 인터뷰 자리에서 배우의 겸손은 당연한 미덕처럼 여겨지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과한 겸양은 가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전도연의 화법은 직설이다. 빈말을 하지 않고 에두르는 법도 없다. 그건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제대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경력을 통해 쌓아 온 업적과 현재의 위치,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잘 알고 있다.

인터뷰가 열린 날 영화 '길복순'은 넷플릭스 비영어 영화 부문 전 세계 1위에 올랐다. 전도연은 "대박이죠? 저 칭찬해 주세요"라고 활짝 웃어 보였다.

단독 주연작이 1위 자리에 오른 건 2013년 출연작 '집으로 가는 길' 이후 10여 년 만이다. 극장 영화와 OTT 영화라는 차이는 있지만 1위라는 타이틀이 주는 기쁨은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국내도 아닌 세계 1위 자리다.

영화를 연출한 변성현 감독은 전도연의 오랜 팬으로 알려져 있다. '길복순'은 변성현 감독이 전도연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 영화다. 변성현 감독은 "무딘 칼이 더 아프다"라는 차민규(설경구)의 대사를 통해 전도연,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페르소나인 설경구에 대한 헌사를 한다. 50대의 두 배우를 바라보는 대중, 업계의 어떤 시선을 투영한 '무딘 칼'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무딘 칼의 매서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일종의 선언을 한 셈이다.

감독의 기대대로 두 배우는 멋지게 해냈다. 무엇보다 전도연은 자신의 첫 액션 영화에서 더딘 몸짓을 극복하는 매력적인 연기로 '죽여주는 킬복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50대 배우의 첫 번째 액션 영화…시작도 끝도 전도연


"'피도 눈물도 없이'라는 영화를 찍긴 했지만 그건 액션이라기보다는 막싸움에 가까웠죠. 제대로 된 액션 영화는 처음이에요."

'길복순'은 데뷔 34년 차 배우 전도연에게 생소한 즐거움을 준 영화다. 2002년 '피도 눈물도 없이', 2015년 '협녀: 칼의 기억'이라는 작품을 통해 액션 장면을 소화한 적 있지만 본격 액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화의 탄생 과정이 흥미롭다. 변성현 감독과 전도연은 몇 해 전 "함께 작업을 하자"라고 뜻을 모았고, 변성현 감독은 전도연을 주인공으로 한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이미 많은 명감독들이 전도연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각자의 판타지를 투영해 써먹었다. 이야기는 물론 장르와 캐릭터에 있어서 많은 고민이 뒤따랐을 것이다. 변성현 감독은 '배우 전도연'과 '엄마 전도연'의 간극에 주목했다.


"배우 전도연이 집에서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하셨던 것 같아요. 코로나19 기간이라 저희 집에서 자주 모였는데 '엄마 전도연'을 관찰하면서 꽤 놀라웠나 봐요. 밖에서는 프로페셔널해 보이는데 집에서는 딸에게 쩔쩔매는 엄마거든요. 게다가 제 어린 시절 꿈이 현모양처였다고 하니 흥미로웠겠죠. 그렇게 탄생한 게 '길복순'이에요. 액션 영화라고 했지만 사실 어떤 작품이 나올지는 몰랐어요."

'길복순'은 촬영분의 50% 이상이 액션신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대사를 기반으로 한 감정 연기보다 몸을 쓰는 액션 연기가 많은 영화를 작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촬영 4개월 전부터 하루 4시간씩 액션 스쿨에서 연습을 했고요. 감독님이 등근육이 필요하다고 해서 웨이트를 하면서 식단도 조절했어요. 액션신은 물론 대역도 있었어요. 액션 영화를 많이 보기는 했지만 특정 배우를 모델 삼아 연기할 수는 없었어요. 다행히도 감독님이 다른 방식으로 액션을 찍을 거라고 하셔서 조금은 안심이 됐던 것 같아요."

'길복순'의 오프닝은 꽤나 인상적이다. 일본의 야쿠자 오다 신이치로(황정민 분)를 납치한 길복순이 그와 대결을 펼치는 시퀀스로 영화의 문을 연다. 길복순은 그를 포박한 상황에서 손쉽게 제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에도시대 장인이 만들었다는 검을 신이치로에게 돌려주고, 자신은 이마트에서 샀다는 3만 원짜리 도끼를 들고 '공정한 대결'을 제안한다. 배경은 현대지만 이들의 대화와 대결은 마치 중국 무협시대 강호들의 그것처럼 예와 절도가 있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특급 킬러라고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대결이다. 복순은 힘으로 밀리는 위기 상황에서 '수 읽기'라는 특별한 재능을 발휘해 신이치로를 제압한다. 황정민과 전도연이 만들어낸 이 오프닝은 '연기 선수'들이 만들어낸 미슐랭 맛집의 애피타이저처럼 다가온다. 전도연은 이 장면을 만들기 위해 황정민에게 카메오 출연을 직접 요청했다. 영화 '너는 내 운명' 이후 18년 만의 재회였다.

"변성현 감독이 황정민이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총대를 메고 연락을 했어요. '당연히 하지'라고 하더라고요. 카메오니까 1~2일이면 될 줄 알았는데 총 4일을 찍었어요. 저는 장시간 연습을 하고 들어갔고, 황정민 씨는 해외에서 '수리남'을 찍고 들어온 터라 한두 번 연습하고 촬영을 시작했어요. 황정민 씨는 오히려 액션을 금방 소화해 냈는데 제가 조금 헤맸어요. 다 찍고 모니터를 보면서 그와 제가 같은 화면에 있는 게 합성처럼 여겨질 정도로 신기했어요. 그게 저희 영화의 첫 액션신 촬영이었어요."

영화에서 보여준 전도연의 액션 연기가 능숙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업계 최고의 킬러라는 설정을 생각하면 그 몸짓은 예상보다 느리고 둔탁하다. '길복순'은 카메라 워킹, 미술과 조명 등을 활용한 미장센으로 전도연의 몸짓을 보완하지만 완성된 액션 장면이 경이롭다고는 볼 수 없다. 액션 영화인데 액션이 준수하지 않다는 건 큰 약점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약점을 상쇄하는 강력한 장점이 있다. 시작도 끝도 전도연이라는 것이다.
 

킬러와 엄마의 모순 '길복순'…전도연과 닮은 이중생활


'길복순'은 영화 제목으로 알 수 있듯 '킬 빌'을 레퍼런스 삼고, '존 윅'의 콘셉트를 따온 영화다. 이 외에도 '킹스맨', '셜록 홈즈' 등 여러 영화들의 주요 장면들이 떠오른다. 때문에 감독만의 독창성이 없는 '짜깁기 장르물'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특별함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전도연은 배우의 매력과 역량이 영화를 어떤 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엄마이자 킬러인 복순의 정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배우 전도연의 삶과 엄마 전도연 삶을 관찰해 온 감독의 시선에서 발전한 아이디어다.

'길복순'은 콘셉트의 영화다. 킬러의 삶을 배우의 삶에 대입했다. 살인청부회사인 MK엔터테인먼트에는 A, B, C로 분류되는 킬러들이 있고 이들은 등급에 따라 국제 혹은 국내 일을 부여받는다. 이들은 임무를 '작품'이라고 칭하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시나리오'라고 부른다. 만화적 설정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영화는 액션 장르의 판타지성을 부각한다. 이 말인 즉, 콘셉트의 수용 여부에 따라 따라 재미의 정도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설정과 만화적 전개가 난무하는 영화다. 여기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엄마 길복순'이다. 전도연은 '킬러 길복순'과 '엄마 길복순'이 각각의 역할을 정신없이 소화하며 발생하는 애환을 그려냈다. 킬러 길복순이 장르 영화의 판타지에 가까운 천하무적 캐릭터라면, 엄마 길복순은 사춘기 딸을 둔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보여준다.

"여태껏 엄마 역할을 몇 작품 했는데 이 작품 속 모녀 관계가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는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아이의 비밀도 모두 알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해요. 저는 일에 대해서는 완벽주의자여서 완벽하려고 애를 쓰고, 후회하기 싫어서 엄청나게 집중하거든요. 그런데 집에서는 그렇지가 못해요. 아이는 제가 완벽하려고 한다고 해서 완벽 안에 들어와 주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아이와의 관계에서는 부족한 점, 취약한 점이 많이 드러나죠."

감독은 아이를 보살피고 키워내는 역할을 하는 '엄마'와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킬러'라는 두 역할을 '길복순'에게 부여하며 인물이 지닌 모순을 부각한다.

전도연은 일상성을 부각해야 하는 '엄마'의 롤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다. 과장된 감정이나, 설정을 배제한 채 툭툭 던지는 말과 몸짓으로 '우리네 엄마스러움'을 만들어냈다. 세밀한 표정으로 킬러의 감정 변화를 시시각각 담아낸 것과도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며 연기 보는 맛을 살려냈다.


자연스러운 연기의 비결에 대해서는 "대사로부터 자유롭자는 생각을 한다"며 "대사 안에 갇히면 많은 것을 놓칠 수가 있기 때문에 촬영 전에 대사를 미친 듯이 외운다. 촬영에 들어가서는 대사를 내 말처럼 하려고 하고 인물로서 뭘 할지를 고민한다"라고 밝혔다.

변성현 감독은 배우의 매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배우의 이면을 끄집어내 캐릭터화하고, 이를 통해 배우의 새로운 얼굴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배우의 연기를 풀어놓는 게 아니라 통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끌어내기에 작업 초반엔 상호 간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변 감독이 배우를 가둬두는 방식으로 작업한다는 걸 모르고 촬영에 들어간 건 아녜요. '불한당' 때 설경구 씨랑도 많이 싸웠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 안에 새로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초반에 촬영을 해보고 '아, 이게 재밌는 과정은 아니구나' 싶었어요. 저는 자유롭게 연기하는 스타일인데 변 감독은 배우들의 움직임을 연출 의도하에 두고 작업하거든요. 첫 촬영이 끝나자마자 '이렇게까지 배우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고 가둬두는 게 맞는 것이냐'며 다투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이후 연출의 의도를 명확히 얘기해 줬고 저는 따랐어요. 시간이 지나서도 이 과정이 재밌다기보다는 영화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어요. 결과물을 보고는, 수긍하게 됐죠."
 

"후배들에게 양보라뇨? 카메라 앞에선 다 라이벌"



전도연은 '길복순'에서 이솜, 이연, 김시아 등과 호흡을 맞췄다. 한 편의 영화에서 이렇게 많은 여배우들과 작업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세 사람은 전도연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개성과 연기력으로 최근 영화계에서 급부상한 배우들이다. 전도연은 이들과의 연기 호흡에서 적잖은 활력과 건강한 긴장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영화 속 대사를 인용해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있느냐'라고 묻자, 전도연은 "제가 뭘 양보해줘야 하죠?"라고 되물었다. 진심과 농담을 반반 섞은 듯한 반응에 일순간 현장에는 웃음이 터졌다.

"극장가가 안 좋긴 하지만 OTT를 통해 많은 작품들이 생겨나면서 젊은 후배들은 다양한 장르, 작품을 할 수 있게 됐잖아요? 저는 그게 부러워요(웃음). 우리 직업이라는 게 누군가에게 양보하는 일은 아니잖아요. 극 중에서 딸로 나오는 (김)시아랑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선후배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동료다. 라이벌 의식을 갖는 게 좋다'라고 말했어요. 카메라 앞에선 다 라이벌이니까 서로 양보, 배려 이런 건 없어요."

전도연은 최근 나이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느끼고 적잖이 놀랐다고 했다. '일타스캔들' 방송 당시 50대의 여배우가 로맨틱 코미디를 하는 것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언론의 기사나 대중의 반응을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나에 대한 선입견이 있을 수밖에 없는 나이라는데, 내가 그걸 의식을 해야 하나? 싶었어요. 저는 나이를 의식하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나기도 하고 좀 답답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난 앞으로 두 번 다시 로코를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아니라 '나중에도 다른 형식의 로코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지'라고 마음먹게 됐어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요(웃음)."
 

전도연의 자신감은 '가치 증명'에서 나온다



'길복순'의 제작비는 150억 원이다. 충무로에서 여배우가 단독 주연인 영화로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다. OTT 영화이기에 가능한 과감한 배팅이었다.

전도연은 지난 3월 '길복순'이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을 받아 베를린을 방문했다. 현지에서 미국 할리우드 리포터와 인터뷰를 가지며 한국 영화계에서의 여배우의 입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그때 전도연은 "어떤 때는 한국에서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역할에서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견해를 듣고 싶었다. 전도연은 "OTT에서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그러나 영화 쪽은 아니에요"라고 전제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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