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전정규 명지중 코치, “저는 운이 좋은 선수였습니다”

손동환 2023. 4. 14.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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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3년 3월호에 게재됐다. 인터뷰는 2월 13일 오후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농구 명문대 진학과 신인 드래프트 1순위 지명에 프로 무대 우승까지. 탄탄대로를 걸은 농구 선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공짜로 얻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농구 인생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모두에서 노력을 했다.
위에 언급된 것 모두 전정규(명지중 코치)의 이야기다. 전정규는 노력 끝에 프로에서도 인정받는 슈터가 됐다. 지금은 프로에서 얻은 노하우를 학생 선수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하지만 전정규는 “나는 운이 좋은 선수였다”며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봤다.

1순위 슈터
광주고와 연세대를 나온 전정규는 안정적인 하체 밸런스와 정교한 손끝 감각을 지닌 슈터였다. 특히, 연세대 시절에는 내로라하는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강점을 보여줬다.
연세대의 황금기를 구축했던 전정규는 2006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 나왔다. 수많은 경쟁자 중 전체 1번으로 프로에 입성했다. 전정규의 행선지는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였다.

2006 KBL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프로에 입성했습니다.
음... 많이 얼떨떨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 말 밖에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얼떨떨했던 것 같아요.
1순위는 어떤 의미였나요?
모든 선수들의 목표는 프로입니다. 1순위로 프로에 가는 건, 더 큰 목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1순위’의 의미가 남달랐던 것 같아요.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을 것 같아요.
트라이아웃 때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지만 프로 팀 감독님들 앞에서 기량을 보여주는 거라, 긴장을 많이 했어요. 제 기량을 보여드리지 못했죠.
전자랜드 농구단의 첫 인상은 어떻던가요?
당시 최명도 형(전 울산 현대모비스 코치)과 표필상 형이 고참이었습니다. 형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어요. 형들이라기보다는 삼촌 같은 느낌이 들었죠.
하지만 형들이 저를 편하게 대해주셨고요. 숙소도 정말 좋았습니다. 자는 곳과 식당, 치료실 모두 그랬어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2인 1실이었어요. 좋은 선배님과 좋은 여건 덕분에, 더 편하게 지냈던 것 같아요.

40% 이상의 3점슛,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규는 전자랜드에서도 슈터를 맡았다. 출전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출전 시간만큼은 자신의 슈팅 감각을 뽐냈다. 조우현(경기당 2.2개)과 김성철(경기당 1.7개) 다음으로, 팀 내 가장 많은 3점슛을 성공했다.
성공률도 꽤 높았다. 40.3%로 경기당 4개 이상의 3점슛을 시도한 선수 중 5위.(1위 : 신기성 - 49.5%, 2위 : 조상현 - 43.6%, 3위 : 김성철 - 41.3%, 4위 : 강대협 - 40.6%) 신인 슈터로서 임팩트를 남겼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었다. 생애 한 번뿐인 신인왕을 이현민(전 울산 현대모비스)에게 내줬기 때문.

전자랜드는 훈련량이 많은 팀으로 유명했습니다.
드래프트 직후, 최희암 감독님께서 새롭게 부임하셨어요. 수비 자세와 공격 움직임 등 하나하나 잡아주셨어요. 그런 디테일한 요소들을 배웠다는 게 더 기억에 남아요.
데뷔 시즌부터 정규리그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전정규는 2006~2007시즌 54경기에 출전했다. 경기당 22분 52초 동안, 8.9점에 경기당 1.6개의 3점슛을 넣었다. 3점슛 성공률은 40.3%였다)

김성철 코치님(전 원주 DB 코치)과 조우현 형이 2~3번 자리에 있었어요. 제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없었죠. 하지만 형들이 아시안게임에 나가면서, 제가 출전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썩 잘하지 못했어요. ‘더 잘했다면 더 많은 결과를 얻었을 건데...’라는 아쉬움이 남았죠.
하지만 신인왕은 이현민에게 돌아갔습니다. 아쉽지 않으셨나요?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신인왕은 프로에서 한 번 밖에 받을 수 없는 상이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팀 성적에 도움을 주지 못했기에, 그런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합니다.

트레이드 그리고
전정규는 2007~2008시즌 중 행선지를 옮겼다. 전자랜드와 오리온스가 3대3 트레이드를 단행할 때, 전정규가 트레이드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전자랜드는 전정규-백주익-카멜로 리를 오리온스로 보냈고, 오리온스는 주태수-정재호-리온 트리밍햄을 전자랜드로 보냈다)
하지만 전정규는 오리온스에서 많은 경험을 했다. 특히, 2015~2016시즌에는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챔피언 결정전에서 뛰었다. 프로 첫 우승도 경험했다. 그리고 2017~2018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2007~2008시즌 중 대구 오리온스(현 고양 캐롯)로 트레이드됐습니다.
4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 위해, 창원으로 떠났어요.(해당 경기가 열린 날은 2007~2008시즌 트레이드 마감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감독님께서 부르시더라고요. 그리고 저한테 “오리온스로 트레이드됐다”고 하셨습니다.
창원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 대구로 바로 넘어갔습니다. 대구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숙소로 같이 이동했어요. 오리온스에서 일정을 곧바로 소화했죠. 돌아보면, 트레이드와 그 이후의 움직임이 너무 급하게 이뤄졌어요. 그래서 더 당황했던 것 같아요.
2015~2016시즌 데뷔 첫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제가 비록 많은 경기를 뛴 건 아니었지만, 팀에 도움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를 포함한 선수들 모두 노력했어요. 감독님과 코치님도 고생하셨고요.
우승 한 번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수두룩하지만, 저는 우승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어요. 우승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경험했죠.
하지만 2017~2018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선수를 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은퇴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더 아쉬웠어요.

은퇴 후
프로 스포츠 선수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과 마주한다. 선수를 평생 동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정규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 여러 경험들을 했다. 그리고 2022년 3월 명지중학교의 코치로 부임했다.
선수 때는 자신의 몸 관리와 자신의 경기력에 집중하면 됐다. 그러나 코치는 다르다. 특히, 유소년 코치는 그렇다. 기본을 다지고 인성을 만들어야 하는 유소년 선수이기에, 책임감과 역할이 막중하다. ‘코치 전정규’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부모님과 여행도 가고, 가족과 못했던 걸 하려고 했습니다. 쉬는데 초점을 맞췄죠.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오래 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소년 농구를 배우기 위해, 클럽에 있는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또, 제가 가르치는 클럽에 3X3 팀이 있어서, 3X3 농구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걸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엘리트 농구부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선배님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낙생고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처음 학생 선수들을 지도하셨습니다. 어떤 걸 느끼셨나요?
제가 운동했을 때와 학생 선수이 운동할 때의 시간 차가 크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 초점을 맞추며, 학생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다만, 당시 낙생고 선수들은 절실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절실함을 심어줄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명지중학교 코치로 부임하셨습니다.
낙생고 어시스턴트 코치를 하던 와중에, 명지중 코치 공고를 봤습니다. 메인 코치가 된다면 학생 선수들과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낙생고 선생님 그리고 코치님과 의논했습니다. 상의 끝에 지원을 했죠.
명지중 학생 선수들에게는 어떤 것들을 강조하셨나요?
면접을 볼 때, 교장선생님과 농구부장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어떻게 지도할 거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학생 선수들 스스로 운동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답했습니다. 지금 학생 선수들에게도 “너희 농구를 대신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좋은 분위기로 운동을 해보자. 또, 선생님 눈치 보고 뛸 거 없다. 지든 이기든, 너희가 신나서 코트를 뛰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죠.
지도자와 선수는 어떤 게 다르던가요?
선수 때 했던 거짓말과 나쁜 행동들이 보이더라고요.(웃음) ‘내가 했던 걸, 아이들도 하고 있구나’라고도 생각했죠. 또, 선수 때는 농구 경기만 봤지만, 지도자가 된 후에는 학생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봤습니다. 학생 선수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다면, 농구 영상이든 다큐멘터리 영상이든 다양한 컨텐츠들을 공유했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뭐하고 지내세요?’의 마지막 주제는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전정규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자신의 농구 인생이 어땠냐?”고 말이다.
전정규는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운이 좋았다. 로또 같았다”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만 해도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가 대학교 입학 후 엘리트 코스를 밟아서였다. 그래서 명지중 코치를 맡고 있는 지금 또한 소중하게 생각했다.

‘농구’는 어떤 의미인가요?
인생의 시작과 끝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지금도 학생 선수들에게 농구를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전정규의 농구 인생’을 한 번 돌아봐주세요.
저는 경기도 오산에서 농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있던 중학교는 전국대회에서 1승도 하지 못했어요. 매 경기 기본 3~50점 차로 졌고요.
저 역시 중학교 3학년 때 183cm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에서 제일 컸어요. 그런 이유로, 센터를 봤죠. 그렇다고 해서, 기량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매 경기 2점 밖에 못 넣던 선수였으니까요.
그리고 광주고로 유학을 갔습니다.(웃음) 어떻게 하다가 슈터로 변신을 했고, 남들이 꿈꾸는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또,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는데도, 저는 1학년 때부터 경기를 뛰었습니다. 신인 드래프트에서도 1순위로 지목됐고요.(웃음) 주목받지 못했던 아마추어 선수가 프로에서 우승까지 차지했기에,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또만큼 운이 좋았던 거죠.
다시 태어나도 농구를 하실 건가요?
음... 그때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웃음) 너무 힘들게 운동을 해서, 아마 다른 걸 해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웃음)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사진 제공 = KBL(본문 1~3번째 사진)-전정규(본문 4~5번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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