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춤’ 창시…‘한국무용 르네상스’ 이끈 무용가 김백봉 별세[플랫]
‘한국무용의 르네상스’를 이끈 무용가 김백봉이 지난 1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대한민국예술원은 12일 고인의 별세 소식을 알렸다. 고인은 한국무용을 대표하는 ‘부채춤’과 ‘화관무’의 창시자이다. 한국 근대 무용을 개척한 최승희의 제자이자 동서다. 최승희의 월북 이후 한국 신무용의 전성기를 이끌어왔다.
고인은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최승희의 공연을 보고 감동해 1941년 일본 도쿄에 있는 최승희무용연구소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최승희무용단 단원으로 정식 데뷔했고, 1944년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동생 안제승과 서울에서 결혼했다.
해방 이후인 1946년 최승희와 함께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최승희무용단 제1무용수, 부소장, 상임안무가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과 함께 월남해 1953년 서울에서 김백봉 무용연구소를 설립했다. <춘광> <심청> <만다라>를 비롯한 600여편의 창작무용 작품을 선보였다.
특히 화관무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부채춤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형 군무로 선보여 한국무용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렸다.
1965~1992년 경희대 무용학과 교수를 지냈고, 2005~2007년 서울시무용단 단장을 맡아 수많은 무용수를 양성했다.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며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보관문화훈장,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부터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으로 선정됐다. 1995년에는 김백봉춤보전회가 만들어졌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4일 오전 7시다. 장지는 해인사 미타원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안병철(경희청한의원 원장), 딸 안병주(경희대 무용학부장)·안나경(김백봉춤연구회 이사장), 사위 장석의, 손녀 안귀호(춤·이음 부대표)가 있다.
‘김충실’이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20년도 불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김백봉’이라 해야 알았다. 10대 후반 도쿄에서 공연을 위해 지은 예명. 백봉(白峰). 그런데 ‘백봉’은 그동안 춤밖에 모르는 ‘취봉’으로 살았다. 사연을 들어보자.
젊은 시절, 불교신자들 모임에서 만난 경봉스님이 끝자락에 앉은 김백봉에게 “아야, 니 뭐꼬! 김백봉이가 뭐야! 하얀 봉우리 위에 뭣이 있겠는가? 나무도 안 자라고, 제자들 키워도 다 없어지고, 돈도 사라지고… 하얀 봉우리엔 다 없다. 이름을 비취 봉우리, ‘취봉’으로 하라!”고 했다. 취봉(翠峰) 김백봉. “이름 바꾼 후 얼마 안돼 훈장을 탔어요. 제자도 늘었고 제 아이들도 잘됐고요.”
취봉이 된 백봉
한국무용의 대명사 김백봉. 지난 봄까지 서울시립무용단장으로 활동한 후 요즘은 서울 서오능 못 미처 위치한 분홍색 연립주택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기자에게 연립주택 오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주고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나보다. 약속이 있던 전날 밤 전화가 왔다. “빌라가 많아 찾기 힘들텐데, 홍은동에 있는 호텔에서 봐요. 거긴 아시지?” 50년 이상 무용교육 현장을 지켜온 증인답게 찬찬하고 꼼꼼하다. 그래도 기자는 다음날 아침 분홍색 주택을 찾았다. 분홍색 반코트 차림의 ‘비취 봉우리’는 나직이 말한다. 감기 걸렸는데 기자를 만나려고 힘내는 주사(링거)를 맞았다고. 결국 홍은동 호텔. 호텔 손님들이 그를 알아본다. 여전히 고운 자태.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자신이 안무한 신무용 ‘부채춤’으로 세계 언론의 화제를 모은 주인공 김백봉은 어딜 가도 세인의 눈을 피할 수 없는 무용가이다.
“저 혼자 이룬 건 없어요. 무용은 혼자 선택했지만! 시골에서 태어나 아무 것도 몰랐는데… 좋은 춤 스승을 만나고, 마음껏 춤출 수 있었던 건, 혼자 힘으로 어림도 없죠. 살아보니 알겠어요. 요즘 자서전을 준비하는 중인데 언제 책을 내겠다고 정확한 시기는 약속 못하겠어요. 그저 부모님과 여러분들의 은혜로 제가 여기까지 왔구나 싶어 하늘에 감사하고, 태양이 주는 하루하루에 감사해요.” 기자에게 재미있는 말을 못해주어 미안하다고 했다. 말주변이 없단다.
한국무용의 대모
김백봉은 68년 멕시코올림픽 때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린 홍보대사였다. “부채춤이 최고의 화제였죠. 그전까지 여러명이 추는 춤은 의상비 때문에 엄두를 못내고 혼자 추는 작품을 안무했는데, 정부에서 군무진의 의상비를 대준다니 마다할 리 없죠. 정부 자체에서 전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예술단원을 선정해 멕시코올림픽에 파견했어요.”
당시 김백봉은 ‘부채춤’을 비롯, 군무로 연결되는 ‘선의 유동’ ‘광란의 제단’, 농악, 장구춤 등으로 한국문화를 알렸다. 청소년기부터 일본 유학을 하며 외국공연을 많이 나갔기에 힘든 건 없었다. 그런데 숨쉬는 게 문제였다. “웃으면 입이 말라 못 다물 정도로 산소가 희박했어요. 우리 무용단원 중 한 사람은 의상을 입고 무대로 나가다 쓰러졌어요. 결국 산소호흡기를 대고 무대로 나가 춤추길 반복했죠.”
50년간 만든 창작춤만 600여편. 88년 서울올림픽에서 2000명의 무용수가 보여준 ‘화관무’는 김백봉의 명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최승희의 제자로 1946년 월북했다 어렵사리 서울로 돌아와 박기홍에게 승무를, 이동안에게 태평무와 승무를 사사한 김백봉. 53년 서울에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세웠고 재미무용가 권려성, 전황 등이 연구생이었다. 600평 규모의 묵정동 연구소에선 200여명의 학생을 지도했는데 임성남, 조광, 송범 등과 시간을 나눠 함께 사용하기도 했다. 61년 한국무용협회 창단 멤버로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서 진수방, 임성남, 송범, 김진걸 등과 함께 안제승작.연출의 ‘비련’을 공연해 한국무용의 주춧돌 역할도 했다. 65년부터 92년까지는 경희대 무용과 교수로 한국무용 발전을 이끌었다. 그의 부채춤이나 화관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진 못했지만 대신 87년 예술원 회원이 됐다. 80년 동안 걸어온 예도(藝道)를 한정된 지면에 얼마나 알뜰하게 담아낼 수 있을까.
아버지의 사랑, 통장
김백봉은 김병삼과 배보규의 4남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김백봉의 춤길은 아버지가 심어주었다. 아버지는 잠자는 6살 꼬마 백봉을 깨워 최승희(1911∼69)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백봉은 최승희춤을 보지도 못했지만 ‘최승희처럼 훌륭한 무용가가 되겠다’고 아버지 앞에서 결심한다. “옛날에 춤춘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무용하면 기생되는 줄 알았는데… 딸 팔아먹는다고! 그런데 아버님은 다르셨어요.”
14세에 최승희 공연을 보기 위해 아버지와 진남포로 갔다. 일제는 최승희의 평양공연을 금했다. 한국춤 추는 최승희를 보고 한국관객들의 민족성이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최승희를 만나기 위해 아버지는 조선사람임을 입증하는 호적까지 준비해갔다. 최승희는 백봉의 소질을 즉석에서 테스트했다. “손과 팔뒤꿈치가 똑바로 펴지는지 보고 일본에서 데려온 제자 장추화와 하리다 요코를 제 옆에 세우고 키를 재더군요. 5∼7살 위인 그들과 제 키가 같아도 좋아하시더군요.”
평양 명륜실업여학교 1년을 다니다 도쿄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 김백봉이 태어나자마자 만든 통장을 일본 유학 가는 백봉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버지는 기름제조회사에서 외국 관계자가 타는 차를 몰았다. 평양 시내에 승용차는 2대. 나머지는 도지사가 탔다. 백봉이 4살 때 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운전면허시험을 치러 갔다. 아버지는 트럭을 소유했고 영어도 잘했다. 염색약 등 화학제품 제조로 돈을 많이 벌었다. 도쿄에서 백봉은 듣도 보도 못한 발레 기본을 배운 후 스승 최승희에게 검사를 받곤 했다. 정월 초하루부터 3일 동안은 스승이 계속 가르쳤다. 당시 학원생은 손가락으로 셀 만큼 몇명 안됐다. 최승희처럼 단발만 했지 어려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백봉은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키며 17세까지 춤을 배웠다. 공연과 안무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최승희를 따라 중국여행도 갔고 일본 도처에서 공연도 했다. 당시 연구생들은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며 연구소를 다닌 덕에 최승희의 안무 작업을 숨어서 엿보며 공부하기도 했다.
“스승과는 말을 별로 주고받지 못했습니다. 나이 차이도 나고 공연으로 바쁘기도 하고… 스승은 완벽한 분이셨어요. 어마어마한 예술성을 발휘하셨죠. 저도 그걸 배우려 했고요.” 공연 후 인력거를 타고 나오는 최승희를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인력거가 뒤집혀지는 일이 허다했다. 결국 최승희처럼 단발한 장추화를 인력거에 태워 내보내고 최승희는 뒷문으로 빠져 나가곤 했다.
최승희의 제자, 최승희의 동서
한국 신무용사를 연 최승희의 수제자 겸 동서인 김백봉은 월북한 최승희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 무용을 일구었다. 최승희의 남편 안막(본명 안필승)은 최승희 제자인 김백봉을 보자마자 동생 안제승(1996년 작고.전 경희대 교수)의 배필로 점찍었다.
안제승과 18세에 서울에서 결혼했다. ‘도쿄유학생’인 남편은 영화연출을 공부했는데, 학도병으로 한국에 가야 했다. 김백봉은 중국공연 후 결혼을 위해 서울로 향했다. 아버지는 남편을 무척 좋아했다. “그이는 저 때문에 희생된 사나이에요. 내조를 잘 해야 했는데 제가 춤 창작하고 제자들 가르치느라 한 게 없어서… 그래도 남편이 잘 지켜주니 아이들이 제대로 컸죠. 그이는 술을 안먹는 대신 담배를 많이 피웠어요. 얼마 전 이장하면서 ‘명당이지만 너무 먼 곳(추풍령)으로 보내 미안하다고 했어요.” 20세에 낳은 안병철 박사(60)는 경희대 한방병원 침구과 과장을 역임하고 현재 개업의로 활동중이다. 밑으로 두 딸 병주(46.경희대 교수)와 병원(44.한북대 초빙교수)도 김백봉의 뒤를 잇는 한국무용가이다.
외조의 힘은 강했다. 김백봉이 발바닥이 쪼개질 정도로 춤추면 남편이 당신, ‘안 자?’ 하며 휴식을 권했다. 최승희도 남편이 하라는 대로 했다. ‘그 춤은 나빠’ 하면 추지 않았다.
“최선생은 월북시 자신의 딸 안성희를 서울에 두었죠. 다시 서울로 가려 했어요. 그런데 김일성이 ‘살러왔수, 댕기러 왔수’ 물으니 우선은 ‘살러왔다’고 대답한 거죠. 저는 최선생님에게 춤을 더 배워야 하고 우리 집도 평양이라 46년 남편, 최선생 부부와 평양으로 갔어요. 3년 있었죠. 성희 낳고 15년 만인 46년에 베이징에서 낳은 최선생님 아들 병권이는 제가 키우다시피했고요. 대신 한살아래 우리 아들은 친정에서 돌봐주었어요. 우리는 한 집에서 살았는데, 김일성이 대동강변의 명월관을 최승희연구소와 살림집으로 개조해주었죠. 병권이가 5살 때 우리는 평양 옆 강선으로 피란을 떠났습니다.”
최승희와의 최후 만남. 헤어질 줄 몰랐기에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한 집에 살아도 최승희가 너무 바빠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6.25전쟁은 김백봉의 집안에도 폭풍으로 다가왔다. 김백봉 부부는 부친.아들(당시 4살)과 남하했지만 모친은 내려오지 못했다. 학교에 성적표 받으러 간 김백봉의 동생들이 귀가하지 않아 그들을 기다려야 했다. 사촌 친척들도 모두 남하했는데 어머니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전쟁 당시 탄환이 날아다니는데도 38선까지 갔지만 아내와 만날 수 없었다.
“부모님 생각! 계속 나죠. 제가 39살일 때, 3재가 들어서인지 사고를 당했어요. 뮌헨올림픽에 공연하러 가지 않겠다고 피할 겸 시골 가는데,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아이를 피하려다 차가 길 밑으로 떨어졌지요. 병원 신세지면서 평양에서 부모님께 못해드려 얼마나 후회했는지요!”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늘 무겁다. 물론 기쁠 때도 있다. 무대에서 춤출 때다. 항상 좋았다. 나빴던 기억? 춤추면서 아팠던 마음은 없다. 항상 행복했다. 단지 수시로 드나들던 경찰서가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이북에서 넘어왔고,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였다. 후회는 없다. 지난해에는 80인생을 정리하며 ’한국신무용 80년사와 김백봉 예(藝)의 삶‘ 공연과 전시도 가졌다. 연립주택에서 혼자 살지만 심심할 틈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이거늘. 더구나 가슴속엔 춤이 들어있지 않은가.
<꽃이 피듯, 파도 일렁이듯 부채춤군무 처음 선보여>
‘신무용’ 장르를 개척한 김백봉. 그가 ‘부채춤’을 처음 선보인 건 1953년 제1회 예술협회 주관으로 서울 낙원동 김백봉 연구소에서 열린 무용발표회였다. 공연으로는 54년 11월26∼28일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김백봉 제1회 발표회에서 처음 소개됐다.
김백봉이 부채춤 군무를 만들기 전까지 부채춤은 혼자 추는 춤이었다. 김백봉은 68년 부채춤 군무작업을 통해 부채의 화려함, 궁중당의의 아름다움, 파도가 일렁이듯 역동적이고 꽃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듯 입체적인 춤사위 개발 등 ‘삼박자’가 상생하는 명무를 만들었다. 파격이었다. 파도 대형은 둥근 2개의 원형을 안팎으로 만들어 높낮이를 달리했다. 또 일렬로 늘어선 무용수들이 물결치듯 간격 맞춘 부채를 위아래로 넘실거리게 흔들었다. 여러 겹의 원형 가운데 한 명의 주인공이 양쪽 손에 든 부채를 쫙 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부채꽃을 이룬 장면은 부채춤의 하이라이트.
김백봉은 자신의 ‘부채춤’이 최승희의 부채춤과 다르다고 했다. 최승희의 부채춤은 부채를 한손에만 들고 추던 무당춤이며 춤가락도 서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 허진무 기자 imagine@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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