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떠난 서울대생…겸업 금지조항 풀리자 '날개' [긱스]
“직장 그만뒀어, 내 사업 하려고.” 회사를 다니다 보면 한 번쯤은 듣게 되는 말. 이면엔 회사 생활과 창업은 양립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20년 차 직장인부터,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까지 국내선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개념입니다. 거대한 창업 생태계를 보유한 미국은 어떨까요? 한경 긱스(Geeks)가 미국 현지 창업에 도전한 김태근 올위즈 대표를 주목한 이유는 그가 “재직 중인 직장은 당장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말한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보스턴의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주변에 창업 사실을 밝히는 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올해 초, 미국 유학과 취업에 대한 정보를 현지 멘토와 나누는 1대1 온라인 상담 플랫폼이 등장했다. 2021년 창업해 해당 서비스를 준비해온 올위즈는 초기 스타트업의 필수 관문으로 꼽힌 창업진흥원 예비창업패키지를 막 끝낸 단계였다. 창업가는 토종 한국인, 업체는 미국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업계 관계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가장 특이한 점은 ‘미국 현지 회사 재직 중 창업’이란 이력이었다.
미국 보스턴 소재 글로벌 제약사 버텍스 파마슈티컬스에서 일하는 김태균 올위즈 대표는 미국과 한국의 창업 환경 차이를 “기회가 더 많다”는 말로 압축했다. “회사에 겸업 금지조항이 없어요. 주어진 업무만 잘 처리하면,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최근 영입한 C레벨도 ‘사이드잡’으로 함께했고, 아직도 본인 회사를 다닙니다.”
국내 액셀러레이터(AC)들도 예비 창업자 지원 사업에서 타 기업에 재직 중인 인력을 받긴 하지만, 이들이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는 절대 대외에 공표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이유인데, 결국 창업 도전 자체가 회사에 불이익을 받을 요인으로 당연시된다는 것이다. 데모데이와 같은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때엔, 공동창업자들이 회사를 미리 퇴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창업가가 기반을 닦아 놓고 퇴사하는 것과 무작정 ‘도전’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김 대표가 겪은 창업 생태계는 이와 정반대인 셈이다.
美 제약사 '재직 중 창업'…회사는 "일만 잘해라"
2019년 김 대표는 하던 공부를 끝냈다. 고생 끝에 미국에서 신경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때였다. 서울대 생명과학부를 졸업하고, 홀로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유학길에 올라 거둔 성과였다. 취직은 전공 분야를 살렸다. 글로벌 제약사인 버텍스가 직장으로 선택됐다. 보직은 신약 개발 연구원이었다. 2020년의 코로나19는 예기치 않게 터졌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사실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을 공부하고 싶었다. 가상현실(VR) 기기와 뇌 기전의 관계를 연구해, 일론 머스크의 ‘뉴럴링크’나 메타의 VR 연구조직에서 일하는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덜컥 와버린 유학, 선택해버린 MIT 연구실은 세부 분야가 미묘하게 달랐다. 원했던 회사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생명공학 전공자보다 컴퓨터공학 전공자를 원했다. 그렇다고 다니던 연구실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어느 순간 ‘유학 준비 단계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낙담했습니다. 현지 상황을 미리 알았다면 미래가 바뀌었을 텐데 하고요. 구직하고 나서는 ‘과거의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서비스를 만들면 어떨까’ 했습니다.”
미혼이었던 그는 코로나19 기간 무료했다. 그렇게 재미있던 게임 ‘디아블로’도 질려버렸다. 때마침 한국에서 지인이 개발 외주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국경에 상관없이 학생, 취업 준비생이면 ‘멘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프로토타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10분에 10달러(약 1만3000원)’라는 가격 방식으로 미국 현지 전문가를 70명까지 끌어모았다. 미국 동부 명문대 네트워크가 있던 그가 하버드, MIT 등의 연구원이나 애플 엔지니어 등을 포섭했다. “위즈가 달인, 명인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서비스명이 올위즈입니다. 위즈가 학력이나 경력을 인증하고 ‘체크 마크’를 받으면, 5달러(약 6600원)든 20달러(약 2만6500원)든 자신의 시간을 쪼개 파는 것이죠.”
직장에선 그의 창업을 막지 않았다. 한 가지 내세웠던 기준은 ‘동종 업계가 아닐 것’. 직무상 얻은 정보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는 없었기에, 플랫폼 창업은 무리가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회사(버텍스)에 갑니다. 근로 시간은 8시간으로, 나머진 재택이고요. 업무 시간을 채우려곤 하지만 사실 성과를 달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버텍스의 시니어 사이언티스트로서 전임상 단계 연구조직에 속한 그는 신장 유전병이나 폐 질환 분야 다수 신약 개발에 참여하며 성과를 냈다. 일하는 시간 빼곤 전부 올위즈 서비스에 집중했다. ‘사이드잡’이 흔한 분위기였던 가운데, 주변에서도 그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학부 졸업 후 약 1년 정도 국내 연구기관에서 일한 적이 그에겐 어색한 분위기였다.
韓 회사서 창업 사실 밝히기는 '불가능'
한국과 미국의 ‘N잡’ 환경 차이는 오래된 화두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고용 유연화를 주창하는 ‘긱 경제(Geek economy)’가 주목받으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직장인의 자투리 시간을 파는 플랫폼인 ‘폴리미’와 같은 스타트업 서비스도 등장했다. 초기 창업가들의 사업은 재직 중인 회사엔 부업인 만큼, 직장인 창업가들도 겸업 금지조항을 다시 주시하고 있다.
미국은 담당 직무와 주별로 차이가 있으나, 전문직이나 고위 임원이 아니라면 겸업 금지가 생소하다. 구글, 메타 등 대기업은 회사 일과 관련이 없다는 조건으로 개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행위를 허용한다. 캘리포니아주 노동법 96조에선, 야간에 일한다는 의미인 ‘문라이팅(moon lighting)’을 법으로 지정했다. 고용주가 야간(자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직원을 처벌할 수 없게끔 했다. 물론 최고경영자(CEO)의 의지로 겸업을 문제삼은 ‘쉬운 해고’가 발생해 분쟁이 터지기도 하지만, 겸업은 코로나19와 재택 근무 확대를 겪으며 더욱 늘었다. △고용주와 이해관계 충돌이 없을 것 △회사 자원을 다른 업무에 쓰지 않을 것 △성과가 저해되지 않을 것을 지킨다면 2개 회사에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을 정도다.
국내서도 원칙적으로 겸업을 금지하는 법 조항은 없다. 다만 민간에서 고용계약을 체결할 때, 사인 간의 계약 성질로 취업규칙에 포함된다. ‘겸업 또는 겸직을 금지한다’는 조항은 강력한 해고 사유가 되기도 한다. 2018년엔 자동차 판매 영업직 사원이 하루 2시간씩 머물며 카페를 운영한 사례가 부산고등법원 재판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사적 활동이 근로제공의무를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다는 기준은 근로자 개인이 판단하기에 모호한 영역이라, 근로 성과가 좋은 직원도 겸업 사실을 회사에 알리기는 쉽지 않다.
노무 전문가인 배태준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본지 통화에서 “미국 기업은 영업비밀이 침해되는 상황에선 확실한 조항을 걸어둔다”면서도 “고용 체계가 유연하기에 근로자가 창업, 부업 등을 이유로 성과가 안 나오면 겸업 금지조항 같은 것 없이 간단히 해고해버리면 된다”고 전했다. “한국의 겸업 금지 계약서는 근로시간 이외 활동까지 막을 수 없지만, 창업 행위가 직장에 대한 충성도가 낮다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가 있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김 대표 역시 별도 업무를 좋게 보지 않는 구성원의 시선을 차이로 지적했다. 근태관리는 별도의 규칙을 정해 평가하고 맡은 바 일에 충실하되, 창업 자체를 직원들끼리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모든 창업가는 사업이 잘되면 퇴사해야겠지만, 1~2년이라도 사업 기반을 닦고 퇴사하는 것과 법인이 설립되고 바로 퇴사하는 것은 차이가 매우 크다”며 “서비스가 자리 잡을 상반기까진 제약사를 퇴사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올위즈에 최근 합류한 오라클 출신 최고기술책임자(CTO)도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다.
지난해 1~3분기 국내에서 부업을 뛰는 전체 근로자 수는 54만 7000명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조사를 진행한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산업구조의 전환과 고용 형태의 다양화 등 복합적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특히 20~30대 부업 근로자는 2017년 7만 8000명에서 같은 기간 10만 7000명으로 늘었다. 임금 수준이 낮고 고용 안정성이 떨어진 것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김 대표는 “정부의 지원이 창업 생태계에 잘 스며드는 각종 초기 창업 진흥 정책은 미국도 못 하는 한국만의 장점”이라며 “재직 중 창업 문화가 활성화된다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환경”이라고 전했다.
이시은 기자 s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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