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코맹맹이 목소리… 의외로 쓰임새 많은 이선균 [라제기의 '배우'다]
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2020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향했다.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 취재를 위해서였다. 영화 ‘기생충’(2019)의 배우 몇몇이 여객기를 함께 타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LA 톰 브래들리 공항에서 혹시 조우할 수 있을까 기대했다.
입국장은 예상보다 혼잡했다. 코로나19가 막 발생했던 때라 한국인 대부분은 마스크를 썼다. 누군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긴 줄에 서서 심사 순서를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이 줄에 서는 게 맞아?” 소음을 뚫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20m가량 떨어진 곳에 배우 이선균이 이정은, 박명훈과 서 있었다. 한국인들 시선이 동시에 그들에게 집중됐다.
이선균의 목소리는 독특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닥터 러브’(2004)나 ‘거미여인의 사랑법’(2005) 등 TV단막극으로 그를 처음 접했을 때도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청아하면서 윤기 있는 코맹맹이 소리라고 할까. 지질하면서도 반항적인 역할에 어울렸다. 그가 눈에 들어온 첫 영화는 ‘손님은 왕이다’(2006)였다. 이선균은 해결사 이장길을 연기했다. 이장길이 쓰러진 인물을 발로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때 불량기 대부분이 목소리에서 발산된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가 출세작인 드라마 ‘하얀거탑’(2007)에서 연기한 최도영은 지질함이나 반항, 불량과는 무관했다. 도영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의사의 길을 제대로 걸으려 한다. 의술을 욕망 실현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장준혁(김명민)과 정반대 인물이다. 이선균은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2007)과 ‘파스타’(2010)를 연달아 히트시켰는데, 둘 다 달콤한 사랑 이야기다. 목소리가 그의 연기 범위를 규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선균은 목소리 때문에 손해를 더 보는 쪽에 속한다고 본다. 그의 표정이나 동작 연기가 종종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는 의외로 로맨스와 스릴러, 코미디 등 다종한 장르에서 쓰임새가 많은 배우이다. 한국 영화계 주연급 배우 중 그처럼 연기 폭이 넓은 이는 많지 않다.
이선균은 까다로우면서도 예민한 인물에도 잘 어울린다. 독단적인 젊은 증권사 대표 강재혁(영화 ‘로맨틱 아일랜드’)과 뒤끝이 만만치 않은 만화가 정배(영화 ‘쩨쩨한 로맨스’)를 들 수 있겠다. 성공한 정보통신 사업가 박동익(‘기생충’)도 여기에 해당된다. 동익이 운전 중 뒤로 고개 돌리는 기택(송강호)에게 “앞에 보세요”라고 말할 때, 아내 연교(조여정)에게 “냄새가 선을 넘지”라며 기택을 평할 때, 단호하면서 퉁명스러운 말투는 이선균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차가운 기운을 뿜는다.
‘킬링 로맨스’(14일 개봉)는 이선균의 새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이선균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이 코미디 영화에서 조나선 나(줄여서 존 나)를 연기했다. 조나선은 ‘꽐라’라는 태평양 섬에서 독재자처럼 살아가는 정체불명 사업가다. 외모부터 비호감이다. 가짜 카이젤 수염을 붙여 위엄 있어 보이려 한다. 포마드를 발라 앞머리를 위로 올리고 뒷머리는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길다. 그는 한때 최고 스타였던 여배우 여래(이하늬)와 결혼한 후 아내를 트로피처럼 대하는 폭력 남편이 된다. 악당 조나선이 기름진 목소리로 “잇츠 굿(It’s Good)”을 연발할 때 관객은 소름과 웃음 사이를 오간다.
40대 후반에 파격 변신이 쉽지는 않았을 듯하다. 게다가 ‘기생충’이 아카데미 후보에 올라 있을 때 출연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킬링 로맨스’의 이원석 감독은 “이 (모험적인) 영화를 절대 안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같이 하고 싶고 안 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게 (출연 제안) 시도라도 해보자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이선균은 아카데미 시상식 즈음 LA를 방문한 이하늬를 만난 후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친분이 있던 이하늬가 출연키로 마음을 굳혔다는 말에 영향을 받았다고. “그게 그의 매력이에요. 계산적이지 않은 배우… 이선균 배우는 조나선이 되기 위해 (촬영) 한 달 전부터 (긴) 머리카락을 붙이고 생활할 만큼 몰입했어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는, 진짜가 되게 하는 그런 배우입니다.”(이원석 감독)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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