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청나라 황제 염주 받고 감격한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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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가 4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4년 뒤인 1790년 6월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뛸 듯이 기뻐했다.
사신단을 접견한 건륭제가 정조의 안부를 묻자, 두 달 전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서 너의 왕에게 주거라. 이것으로 내 기뻐하는 마음을 표하노라!" 먼저 귀국하는 선래역관(先來譯官)이 돌아와 염주를 정조에게 올리자, 정조는 염주를 목에 걸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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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가 4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4년 뒤인 1790년 6월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뛸 듯이 기뻐했다. 대사령으로 죄인도 풀려나고 이래저래 나라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해 조선에서는 청(淸) 건륭제의 팔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별사(別使)를 파견하였다. 사신단을 접견한 건륭제가 정조의 안부를 묻자, 두 달 전 아들을 낳았다고 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건륭제는 목에 걸고 있던 염주를 벗어 주었다. “가서 너의 왕에게 주거라. 이것으로 내 기뻐하는 마음을 표하노라!” 먼저 귀국하는 선래역관(先來譯官)이 돌아와 염주를 정조에게 올리자, 정조는 염주를 목에 걸며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건 황상께서 하사하신 것이로다!”
그 모습을 보던 한 사람이 엎드려 한마디 아뢰었다(아니, 배알이 틀려 한마디 내뱉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정조가 각별히 믿고 총애했던 윤행임(尹行恁)이다. “전하께서 평소 춘추의리(春秋義理)를 자임하시더니, 어떻게 지금 이런 지나친 거동을 하시는지요. 신은 취할 수 없나이다.” ‘취할 수 없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다.
‘춘추의리’란 무엇인가? <춘추>란 책에서 말한, 종주국인 주(周)나라를 떠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올바른 생각’을 말한다. 당시 조선에 대입하자면, 중화(中華)인 명(明)을 떠받들고 오랑캐인 청(淸)를 물리치자는 꿋꿋하고 갸륵한 생각이다. 그런데 명은 한참 전에 망했고, 청은 세계제국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명은 현실적으로 섬길 수 없었고, 현실의 청은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지배계급은 ‘춘추의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청을 오랑캐라 멸시하고 조선을 중화문명의 계승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춘추의리는 빈말이거나 ‘정신승리’가 아니었다. 1766년 홍대용은 항주 출신으로 과거를 치기 위해 북경에 머무르고 있던 반정균·엄성·육비 등 중국인(漢人) 세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홍대용이 서울로 돌아오자 김종후(金鍾厚)는 오랑캐 조정에 벼슬하려는 자들 역시 더러운 오랑캐이며, 그런 자들과의 친교를 자랑하는 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쏘아붙였다. 1780년 박지원이 <열하일기>를 써서 내놓자 ‘건륭’이란 청나라 연호를 썼다고 하여, ‘호로지고(胡虜之藁)’ 곧 오랑캐의 글이라고 씹기도 하였다. 이것이 춘추대의였다. 정조는 그런 춘추대의를 스스로 떠맡고 나선 인물이었던 것이다.
윤행임의 말에 정조는 이렇게 답했다. “경의 말도 옳다. 다만 황제의 은혜가 이와 같다. 의리는 의리고, 은혜는 은혜다. 내 어찌 감사하는 마음이 없겠느냐?” 정조의 말은 타당한가? 원래 ‘춘추의리’는 비타협적인 신념이다. <열하일기>에 ‘건륭’이란 연호를 쓴 것조차 문제 삼는 신념에 의하면 건륭제는 오랑캐의 괴수다. 그 신념은 덕담 한마디, 염주 하나에 바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시대착오적 춘추의리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국왕이 염주 하나에 자신이 견지했던 비타협적 신념을 버리고 ‘황상의 은혜’를 들먹이는 꼴을 보자니, 심사가 무한히 착잡하다. 지금 한국 외교에 염주 하나에 지켜야 할 신념을 버리고 희희낙락하는 꼴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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