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이 심장에 머물 수 있게 번역하고 싶어요” [책&생각]
조은영 번역가가 서울대 생물학과 1학년 때 일이다. 5월, 채집 여행을 간 산에서 한 선배가 흰 꽃이 다닥다닥 핀 관목을 가리켰다. “이름이 뭐게?” 몰랐다. 선배는 나무심이 국수 가닥처럼 뽑혀 국수나무라고 했다. 이건 족도리풀, 저건 애기똥풀…. 무심히 넘겼다. 이듬해 채집 여행에서 그는 “노란 꽃잎이 네 장 달린 평범한 꽃이, 애기똥풀이라는 특별한 식물이 되어 천지에 비슷비슷한 꽃 가운데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순간”을 경험했다. “익명의 숲이 새롭게 거듭나던 충격”을 느꼈다. <코드 브레이커>(월터 아이작슨, 웅진지식하우스, 2022), <이토록 멋진 곤충>(안네 스베르드루프-튀게손, 단추, 2020) 등 조 번역가가 옮긴 50여 권의 과학책들은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안긴다.
“뼛속까지 이과였던 사람이라 글 쓰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식물분류학과 식물분자유전학을 공부하며 실험실에서 10년 넘게 보냈다. 번역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연구실에서 일할 때 과학책 검토가 들어왔다. 10만원을 준다기에 아르바이트하는 마음으로 책에 대한 의견을 쓰고 발췌 번역을 했다. 그 번역을 눈여겨본 정선영 편집자(도도서가 대표)가 이후 <10퍼센트 인간>(앨러나 콜렌, 시공사, 2016)을 맡겼다. “힘들었지만 뿌듯했어요. 인생에 선물처럼 찾아온 일회성 이벤트라고만 생각했는데 이후로 계속 번역 의뢰가 들어왔어요.” 두 번째 책은 한국과학창의재단 우수과학도서로 뽑힌 <세렝게티 법칙>(션 캐럴, 곰출판, 2016)이다. “거시생물학과 미시생물학을 두루 공부한 게 번역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8년차 번역가인 그는 20여 권을 옮긴 뒤에야 자신을 번역가라고 소개할 수 있었다. 자기한테 야박하다. “나는 부족하니까”라며 ‘무한’ 퇴고한다. “머리말은 30번 넘게 들여다본 적도 많아요. 거슬리는 데가 없을 때까지 계속 고쳐요. 제 이름이 새겨지는 책이니 그 정도 노력은 해야죠.” 먼저 원문을 읽어가며 직역을 마친다. 원문과 초벌을 비교하며 본격적으로 문장을 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장을 다듬고, 다듬고…. 그는 “설거지하며 드라마 보는 시간”을 빼놓고는 거의 일한다. “아직 성장하는 과정이라 어떤 책이든 가리지 않아요. 모든 책이 도전이에요.”
별별 생물처럼 별별 과학책이 있다. 논문 수준의 전문서, 1000개 단어만 써야 하는 책 등 다양하다. <나무의 세계>(조너던 드로리, 시공사, 2020)는 삽화가 압권인데, 그게 바로 번역가에겐 골칫거리다. 삽화에 맞게 글을 배치하려니 분량을 딱 맞춰야 했다. “보통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면 1.5배 늘어나거든요. 문장을 계속 다듬고 줄였어요.” 그의 역서 절반은 어린이책이다. “영어식 말놀음을 옮기는 게 만만치 않아요.” 원작의 영문번역을 한국어로 옮길 때는 세 가지 언어를 오가며 확인한다. “과학책 번역은 오류 없는 팩트 전달이 중요해요. 올바른 전문용어는 물론이고 책 성격에 맞춰 가장 적절한 문장과 용어가 뭔지 매 순간 판단해야 해요. 번역가는 판단하는 값을 받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려운 과학책은 쉽게, 쉬운 과학책은 재미있게 옮기려는 번역가.” 책에 자신을 소개할 때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번은 “저자에 빙의된 메소드 번역가를 꿈꾼다”로 바꾸려다 편집자가 웃으며 만류해 거뒀다. 그래도 ‘메소드 번역가’는 그의 작업 지침이다. “첫 번역서를 읽은 지인들이 제가 옆에서 설명하는 것 같다고 해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번역문에서 제 목소리가 들리면 안 되잖아요. 최대한 저자의 목소리를 살리려고 애를 써요.”
조 번역가는 “이번 책이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번역해 왔다. “다음 의뢰가 안 들어오면 실망할까 봐요.” 그만큼 번역 일을 좋아한다. “저자가 몇 년에 걸쳐 발로 뛰어 얻은 통찰의 집대성을 보는 지적 쾌감이 있어요. 그런 책들을 곱씹어 읽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이죠. 저자의 의도에 따라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을 때만 볼 수 있는 큰 그림이 있더라고요.”
홀로 작업이 외롭지 않을까? “처음에는 제 번역하기에 급급해서 몰랐는데 어느 순간 한 권의 책은 번역가와 편집자, 디자이너, 마케터의 협업으로 탄생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팀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동지애도 생겨요.”
에스엔에스(SNS)에 그가 번역한 문장들이 퍼 날라질 때가 있다. 독자에게 가닿은 문장이다. “팩트 위주의 과학책을 주로 옮기지만 독자의 심장에 머무는 책도 작업하고 싶어요.” 요즘엔 퀴어 바이러스학자가 본 팬데믹에 관한 책을 옮기고 있다. “꿈이 있다면” 과학출판사 ‘도장깨기’다. “과학책을 내는 출판사들과 모두 한 번씩 작업해보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말을 그만할 수 있을까?
글·사진 김소민 자유기고가 regardmoi@gmail.com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새들의 방식: 새들은 어떻게 말하고 일하고 놀고 양육하고 생각할까?
이 책에 나오는 새들은 이름부터 하는 짓까지 모두 기괴하다. 말하기, 일하기, 놀기, 짝짓기, 양육하기의 범주에서 주류에 반기를 드는 낯선 새들을 소개한다. 조 번역가는 “새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깨부수는 책”이라고 말했다. “유튜브에서 새 이름을 검색하고 소리를 들으면서 읽으면 재미가 배가돼요.”
제니퍼 애커먼 지음, 까치(2020)
언더랜드: 심원의 시간 여행
전 세계 다양한 땅 밑 세상을 탐험하는 생태인문 여행기이다. 조 번역가는 “과학과 인문을 넘나드는 놀라운 책”이자 “애정이 많이 담긴 책”이라고 소개했다. 파리의 카타콤, 에핑 포레스트의 곰팡이 네트워크, 그린란드의 물랭 등을 소개하며 거기에 얽힌 인간사, 자연사를 저자 자신과 언더랜드에 영혼을 바친 전문가들의 시선을 엮어 펼쳐놓는다.
로버트 맥팔레인 지음, 소소의책(2020)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만 년 나이테에 켜켜이 새겨진 나무의 기쁨과 슬픔
연륜기후학자는 나무의 나이테를 연구해 과거 기후를 재구성한다. 내로라하는 제국들도 별수 없이 기후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과거의 기후 자료는 현재의 기후위기와 미래를 예측하는 데 기초자료가 된다. 조 번역가는 “이상 기후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강추한다”며 “과학의 현장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책"이라고 말했다.
발레리 트루에 지음, 부키(2021)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장애, 세상을 재설계하다
강연대는 왜 그 높이일까? 모든 도구는 세상과 몸의 간극을 메우는 보조기술이다. ‘표준’에 맞춰진 도구는 다양한 몸을 배제한다. 혁신은 첨단 시술로만 가능할까? 저자는 맞춤형 골판지 가구, 농인 대학교, 루게릭병 환자가 설계한 집, 치매 마을 등을 소개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문다. 조 번역가는 “장애를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인간 존재의 한 상태로 보는 시각이 좋았다”고 말했다.
사라 헨드렌 지음, 김영사(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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