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리스본행 야간열차’ 이후 또다른 아름다운 일탈

임인택 2023. 4.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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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메르시어 16년 만의 신작
스위스 출신 소설가 파스칼 메르시어(78). 그가 철학서를 펴낼 땐 본명인 페터 비에리를 쓴다. 사진 은행나무 제공

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l 비채 l 2만2000원

최근 챗지피티가 대체할 가능성의 직업 1위에 통·번역이 꼽혔다. 데이터분석 전문가나 회계사, 세무사보다 높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지난 2일까지 닷새간 18살 이상 1000명에게 온라인 설문조사한 결과다.

이런 대중적 인식과 문학적 인식의 거리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리스본행 야간열차>(2004)를 썼던 스위스 출신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78)에겐 가히 기괴한 저주일지 모른다. 그가 16년 만에 내놓은 장편 신작 <언어의 무게>가 그 증거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철학 교수이기도 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선뜻 오르는 스위스 고교 교사의 일탈 행위가 자본주의 논리에 지쳐 대학을 떠난 과거의 그를 원형질 삼았을 것이다. <삶의 격> <자기 결정> <자유의 기술> 등 철학서엔 본명을 쓴다. 페터 비에리. 파스칼 메르시어는 페터 비에리의 ‘일탈’이고 하여 바라건대 종착지에 -죽지 않음으로서의- ‘삶’의 재창조가 있다 해야겠다, 문학의 언어로 강구되는.

철학적 사유를 장편 서사의 요긴한 나룻배 삼아 독자의 승선을 요하기에 메르시어의 소설은 현학적입네 외면받을 법도 하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독일어권서 이미 200만부가 팔렸음에도, 2007년 국내 출간 당시 요약 정보 외 미디어 서평기사가 한 꼭지 없었다. 전은경 번역가는 13일 <한겨레>에 “출판사에서 번역가를 2~3년간 못 찾았다고 들었다. 읽어나 볼까 가져왔는데 너무 빠져들었다”며 “호불호가 너무 갈리겠지만 100권만 팔려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다”고 말한다. 국내 문단에서 언급되며 인기를 얻고, 2014년 소설 원작의 영화 개봉으로 더 대중화됐다.

소설을 원작 삼은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장면. 스틸컷

전작에 이어 <언어의 무게>도 웅숭깊어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매듭이 두 작품을 잇고 있다.

출판업으로 성공한 사이먼 레이랜드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제 과거를 거슬러 가며 생의 줄기 같은 인연들을 되짚는다. 뉴스 속 어느 국가의 언어가, 그가 사랑한 이들이 마지막 읽던 책이, 어떤 은어, 어느 문장, 어떤 리듬이 매개가 되어 그를 생동한 한때로 돌려보낸다.

‘매개’란 표현은 충분하지 않겠다. 레이랜드는 언어가 전부인 사람이다. 번역가로 평생을 투신하고자 했다.

“…모든 것은 이름이 불리고 이야기된 후에야 실제로 존재했다. 레이랜드가 찾아 나선 게 아니라 그게 그에게 와서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랬다. 언어 없이 사물에 도달하기를, 사물과 사람과 감정과 꿈에 닿기를 원할 때도 자주 있었지만 언제나 그사이에 언어가 다시 끼어들었다. 언어로 이해해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할 때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다. 리비아와의 경우에만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아내 리비아는 11년 전 죽었다. 강압과 권위가 싫어 부모와 대학으로부터 뛰쳐나가 호텔 야간경비를 하며 우연히 고객의 어린이책 번역을 도우며 본격적인 ‘언어 탐험’을 시작한 청년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로 이주하게 한 이가 리비아다. 독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트리에스테 사투리로 서로의 단어와 의미를 어떻게 번역할지 얘기하며 서로의 언어를 나누고 마침내 서로의 세계를 일치시킨 단 한 사람.

언어가 관계를 형성하고 정의하는 힘은 일찌감치 체득한 바다. 세 언어를 부모로부터 배웠으나 영어를 주로 쓰는 아버지(법률 공직자)에게 프랑스·독어로 대꾸하는 건 반항이고, 엄마(독일·프랑스문학 교수)와 대화 언어도 대화 온도에 따라 선택됐다. “아버지의 거만한 영어 말투에 엄마가 번쩍이는 플뢰레의 타격 같은 프랑스어로 대답할 때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럴 때면 완벽한 타인이 마주보고 있는 듯했다.”

레이랜드에게 아내를 잃은 10여년 세월에 더해진 뇌종양 판정은 ‘언어의 상실’을 의미한다. 존엄의 상실이므로, 그는 연명을 위한 수술 치료도 거부한다. 존경하는 삼촌 워런이 이미 가본 길이다. 런던대 동양어 교수였던 삼촌은 심장약을 지속해 복용해야 했으나 눈의 고통이 너무 심해 중단하기로 한다. 심정지를 각오하고 글을 쓰고 읽기 위함이다. 그 또한 희소한 변방 언어들로 쓰인 문학작품의 번역가.

언어는 고통보다 강하고, 올바른 번역은 올바른 삶만큼 치열하다. 삼촌이 유산으로 남긴 집에서 레이랜드가 제2의 삶을 시작하는 배경이겠다. 레이랜드의 시한부 판정이 오진이라고 확인된 뒤다.

레이랜드는 언어와 문학에 기대 사는 이들과의 관계를 형성해 가고, 스스로 번역을 넘어 자신만의 글쓰기로 나아간다. 주제와 인물을 구상해가는 격정은 곧 -죽지 않음으로서의- ‘삶’의 행로에서 새로 구해지는 정동일 터, 그는 말한다.

“…물론 번역을 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장소와 장면을 늘 생생하게 상상하긴 했어. 하지만 그때의 내 상상력은 그저 ‘공감’하는 거였지. 하지만 이제는 돌멩이 하나하나와 층계와 난간,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 정적 속에 울리는 모든 소음을 만들어내야 해… 이 모든 건 어디서 올까? 당연히…… 나에게서 나오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직은 자세히 모르지만 이 사실을 안다는 게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오늘 내 첫 소설에서 겨우 두 단락을 썼어. 하루 종일 걸렸지.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이제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이야!”

존엄과 환희는 일탈한 세계에서 구해지며, 그 세계로 가려거든 낯선 언어, 미지의 언어가 필요하다. 기실 무기력한 주인공이 자신은 모르던 포르투갈어로 쓰인 <언어의 연금술사>를 보고 저자인 ‘아마데우 드 프라두’란 남성-창작된 인물이다-에 매료되어 그의 굴곡된 삶을 복원하는 여정이 <리스본행 야간열차>란 점도 마찬가지다.

“글쓰기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확성과 이해를 만들어낸다. 또는 그런 착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언어에 운이 좋은 사람은 스스로를 향해 눈을 뜨는 것과 같아서 새로운 시간을 경험한다. 시의 현존이라는 시간이다.”(페드루 바스쿠 드 알메이다 프라두, <시의 시간>, 1903년, 리스본)

흥미롭게 이번 소설도 위와 같은 작가 ‘프라두’의 글귀(서언)로 열린다. 다만 성만 같다는 점을 보았을 때,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 작가 프라두를 있게 한 선대일 법하다. 레이랜드가 삼촌 워런의 유언(“나는 내 자신의 목소리를 향해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을 받아 비로소 ‘작가행 열차’에 오른 것과 닮았다.

이것의 의미는 워런의 ‘번역론’에 의해 더 올돌해진다. “번역자의 독자성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점에 있고… 이걸 번역자의 필체라고 부를 수 있다… 나 자신의 언어이기도 하다… 이 텍스트는 내 것이 아니면서도 내 것이다… 이 목소리에서 언젠가는 다시 나에게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에게’라니, 그건 어디일까?”

독자적 언어의 구축이 이처럼 망망하므로, 가장 개별적인 문학, 그 가운데서도 고통과 존엄은 집단지식을 추출할 뿐인 어떤 인공지능으로도 아직은 번역되기 어렵겠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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