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당신은 잠시 미온수에 발을 담근 듯이

한겨레 2023. 4. 14.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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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그렇게 예뻤대." 이 대사가 나올 때부터였다.

주름지지 않은 피부와 맑은 눈,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면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김멜라의 단편소설 '나뭇잎이 마르고'가 살갑게 다가오는 것은 등장인물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 때문이다.

독자는 미온수에 잠깐 발을 담갔다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온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극적인 사건을 통과하거나, 독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작위적인 설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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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은의 책들 사이로]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나뭇잎이 마르고
김멜라 l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21> 수록

“내가 어릴 때 그렇게 예뻤대.” 이 대사가 나올 때부터였다. 살아 있는 우리네 인간들 모두에게 뭉클한 애정을 느낀 것은. 예뻤을 것이다. 나도, 너도, 침상에 누운 병자도, 작은 공간에 갇혀 출소할 날을 기다리고 있을 수형자도. 얼마나 예뻤겠는가. 주름지지 않은 피부와 맑은 눈,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면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빛을 받는 듯 눈부셔하며 쳐다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런 보석이었다. 빛나고, 흠 없고, 보는 이들의 얼굴에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내고야 마는 원석이었을 것이다.

김멜라의 단편소설 ‘나뭇잎이 마르고’가 살갑게 다가오는 것은 등장인물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 때문이다. 앙헬, 체, 대니라는 낯선 외국 이름으로 불리는 세 명의 여성은 서로를 극진하게 대하지도, 냉대하지도 않는다. 무심한 듯 소소한 일상을 유지하면서, 상대에게 ‘적당한’ 배려가 섞인 대우를 한다. 그런데 이 ‘적당함’이 인상적이다. 기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평균치라 가정할 수 있을 이들의 만남의 방식이, 특별하고 귀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원래 소중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소소한 방식으로 귀하게 여겨지는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현실에서 사람들 간 서로에 대한 배려가 ‘적당하게’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 중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체이다. 체는 발음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지만 타인에게 열심히 말을 걸고, “한쪽 다리가 안쪽으로 휘어져 있어” 남들과 걸음걸이가 다르지만 “함께 걷는 이의 속도에 맞추려 애쓰지 않고 자기의 리듬대로 발을 뻗고 어깨와 팔로 타원을 그리며 나아가”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들을 자기에게 우호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즐긴다.” 신체적 약점이 많지만, 체는 다른 이들보다 더 넓고 강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먼저 주고, 준 만큼 되돌려받지 못해도 다시 자기의 것을 주었고, 결국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체에게서, 친구인 앙헬은 자신이 다 헤아릴 수 없는 넓고 깊은 품을 발견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는 사회가 설정한 기준점이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모두 신체적·정신적 약점을 갖고 있다. 그중 일부는 사회적으로 ‘비장애’라 해석되고, 일부는 ‘장애’라고 해석된다. 김멜라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소소한 것인지 알려준다. 아기였을 때 저마다 가장 귀했을 우리 모두가 성장해 어른이 된 뒤, 탄생의 순간 자신 못지않게 귀했을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독자는 미온수에 잠깐 발을 담갔다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온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극적인 사건을 통과하거나, 독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작위적인 설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재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벗어나지 않으며, 전개 방식도 담담하고 잔잔하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엔 이러한 평범함과 잔잔함이 도리어 현실에 드물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의 특별함은 바로 그 지점, 소설 속 평범함과 현실 속 평범함 사이의 간극을 스미듯 자연스럽게 형상화했다는 데에 있다.

정아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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