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비밀의 방] 60. 무대는 내 생의 전부였다-연극인 이영철
초등교사 생활 접고 춘천 이주
춘천교대 출신 극단 ‘굴레’ 창단
전국연극제 우수상 등 대성황
가난·해체 위기에도 연습 매진
도내 순회공연 등 연이어 성공
춘천인형극제 전통 기틀 마련
낯선 방문자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시골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 때였다. 1975년 어느 봄날 오후, 낯선 방문객 두 분이 나를 찾아왔다. 젊은 청년들이었다. 춘천교육대학을 갓 졸업한 이분들은 초등교사 발령 대기 중이었다. 이영철과 이현용 둘은 춘천교대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며 극단 ‘굴레’를 창단한 동인이라 했다. 셋은 ‘흘리’라는 주점에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연극 이야기였다. 그날 나는 이 사람들이 연극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특히 이영철이 그랬다. 이 사람, 연극에 미쳐 있구나.
열망과 결행
그들이 다녀간 뒤 그해 7월 여름, 이영철은 우리 마을의 인근 어론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우연이었을까. 그와 4㎞ 거리여서 우린 기회 있을 때마다 자주 만났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80년 초, 그해 나는 이 나라 남쪽 끝 완도수산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완도에서 이영철의 소식을 들었다. 이영철이 5년간의 짧은 초등교사 생활을 접고 춘천으로 줄행랑쳤다는. 당연히 연극을 하기 위해서라 했다. 결국 저질렀구나.
아버지, 제게 무대는 꿈입니다
연어가 마침내 태생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노여움은 컸다. 불과 5년 선생 노릇을 하고 집에 들어온 자식을 반가이 맞이할 부모란 없을 테니까. 아버지. 제 꿈은 무대입니다. 아버지는 오래 침묵했다. 자신도 젊은 시절에 연극을 했었으니까. 당시 대배우 김승호가 연출한 작품을 가지고 전국을 순회했던 날들을 기억해 냈다. 그래, 이놈의 핏속엔 내 꿈도 들어있어. 그랬다. 유전자는 어쩔 수가 없나 보았다. 이영철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젊은 연극인들에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80년 8월, 나 또한 완도에서 강원고로 전근해 왔다.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굴레의 시작
이영철이 몸담은 극단 ‘굴레’는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굴레는 춘천교대 출신들만의 극단이어서 졸업하면 교사로 발령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영철은 결단을 내려 문호를 개방했다. 연극을 하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든 다 받았다. 그때부터 굴레는 춘천 연극의 주력으로 선두에 나섰다. 재능있고 열의에 찬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우수한 공연들이 그로부터 연달아 터졌다.
나는 요선동에 자리 잡은 ‘굴레’ 극단 지하 연습실을 찾아가 연습 장면을 지켜보곤 했다. 당시 배우였던 신정희 님은 얼마 후 이영철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다. 1984년 이영철 연출로 ‘품바’가 무대에 올려졌다. 대성황이었다. 당시 배우 성낙중은 연일 강행되는 공연으로 목이 꽉 잠겨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다. 품바의 성공으로 이영철은 힘을 얻어 곧 다음 작품에 돌입했다.
80년대 젊은이들의 꿈
그해 시월, 무대에 올려진 ‘그대의 말일 뿐’은 굴레의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굴레는 이 작품으로 전국연극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더불어 이영철도 연출상을 받았다. 또한 강원연극제에서도 최우수상을 차지하여 굴레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 연극은 강원지역 전국 순회공연과 더불어 굴레 30주년 기념공연을 연달아 이어가면서 굴레의 ‘빛나는 진주’가 되었다.
무대에 끝까지 남은 사람들
그러나 연출가이든 배우이든 스텝이든 우선 경제적 궁핍을 해결해야 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릴 때마다 빚이 쌓여갔다. 움직일 때마다 돌부리에 차였다고 했다. 해체라는 위기가 수도 없이 닥쳤다. 단원들이 하나둘 떠나면 소극장의 텅 빈 무대가 이영철의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무대에서 살고 무대에서 죽을 결심을 하지 않았던가. 이 물음이 이영철의 뇌리를 스쳤다. 이영철은 시청 공무원으로 들어갔다. 가정 살림도 그렇지만, 굴레를 살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손바닥만한 월급은 살림과 연극에 긴급 수혈하는 역할을 했다. 연극인은 무대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게 이영철의 신념이었다. 엄하고 혹독한 시련을 견디지 못한 단원들은 굴레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눈물을 삼키며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대본을 외우고 또 외워서 완전히 소화하도록 했다. 토론을 통해 가열하게 서로를 독려했다. 연습도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1989년 청소년 뮤지컬 ‘방황하는 별들’이 무대에 올랐을 때 단원 모두 깜짝 놀랐다. 너무나 인기가 좋아 강원도 장기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 수익으로 요선동 지하에 소극장을 마련했다.
그 후 연이어 뮤지컬 ‘철부지’도 호평을 받았다. 청소년 뮤지컬이 성공하자 아동극단 ‘꿈동이인형극단’을 창단했다. 이영철이 대표를 맡았다. 현 도모 대표인 황운기와 현 꿈동이 인형극단장인 신영우가 이영철을 도왔다. 아동극이나 청소년극은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목마름을 축여주는 기폭제였다. 청소년들은 열광했다. 강원도 전역을 돌아다녔다. 벽지에 가선 무료 연극도 했다. 연출가도 배우도 스태프들도 모두 신바람이 났다.
1990년 이후
이후 ‘방황하는 별들’은 90년대 들어 재공연을 여러 번 가졌다. 2000년 초반까지 공연을 이어갔다. ‘방황하는 별들’은 굴레의 대표 명작으로 청소년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990년 초에 공연되었던 ‘백설공주’도 인기가 있었다. 이것은 극단 재정에 커다란 보탬이 되어 주었다. 그 후 ‘장화 신은 고양이’, ‘요술공주 밍키’가 이영철의 연출로 올려졌고, ‘피노키오’가 김창기 연출로, ‘크리스마스 악몽’이 황운기 연출로 인기를 얻어갔다. 굴레의 역사에서, 80년대가 도약의 시대였다면 90년대 이후는 추동의 시대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동극과 인형극에 대한 굴레의 오랜 투자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이끌었다. 춘천인형극제가 지금까지 오랜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굴레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의 삶은 연극일까
이영철의 나날은 늘 요선동 굴레 소극장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물론 생업을 위하여 춘천시 공무원 생활은 계속했다. 근무 외의 나머지 시간은 오직 무대에서 보냈다. 그리고 연극을 위해 예술행정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상도 많이 받았다. 그것은 오로지 고락을 함께한 단원들의 눈물과 땀과 인내가 동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21년 춘천예총회장직을 내려놓고 이영철은 자유인이 되었다. 공무원 생활도 마쳤다. 이영철은 이제 은퇴자이다. 하지만 나이가 깊어짐에도 불구하고 초심을 품었던 80년 그날의 결심은 여전했다. 이영철은 아직도 현역이었다. 50년간 이영철은 연극만 꿈꾸고 연극만 해왔다. 일상의 모두가 연극 속의 대사와 몸짓 같았다. 지금도 그는 멈추지 않고 희곡을 집필 중이다. 그동안 160여 편의 작품을 했다. 직접 희곡을 써서 무대에 올렸고, 배우로서 20여 작품에 출연했다. 하지만 대부분을 연출가로서 보냈다. 어림셈으로 연출만 140여 편이 넘었다. 나는 연극처럼 생을 살았다. 아니 연극 그 자체였다. 이영철은 그렇게 자신에게 묻고 답하기를 수도 없이 했다. 문득 아버지의 산소를 찾고 싶었다. 그렇다. 아버지였다.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아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아버지! 아버지, 어떠세요? 이제는 자유인으로서 당당히 하늘무대에 서 계시지 않나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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