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류학자, 한국 대기업 입사해 '미생'이 된 까닭은? [책과 세상]
'까라면 까'의 시대는 지났다. 연공서열과 직급, 사내 정치로 촘촘하게 질서가 정렬된 한국 기업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맥주 한잔할까"하는 상사 제안에 "운동해야 한다"며 거절하는 후배. 내심 '나 때는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든다면? 섭섭함을 드러낼 순 없다. 이제는 상사도 '꼰대'로 인식되는 건 두렵다.
'위계'는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열쇳말이었다. 전쟁 후 황폐화한 나라가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상명하복 틀 안에서 한국인은 일개미처럼 근면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먹고사니즘'이 충족되고 개인주의가 부상하자 더 이상 위계는 개인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기제가 되지 못한다.
'백인 남성 인류학자'의 눈으로 본 21세기 '탈(脫)위계' 한국 사회의 회사와 회사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미국인 한국학 연구자가 '초기업'이라는 제목의 신간에서 던지는 화두다. 현실에 존재하는 기업 '상도그룹(가칭)'이 무대다. 그는 2014년부터 1년간 십수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상도그룹 지주회사 HR팀 인턴으로 근무하며 한국 사회의 변화와 맞물린 기업의 과도기적 문제를 현장에서 낱낱이 기록했다.
한국에서 회사는 돈 버는 곳 그 이상이다. 정규직이냐 아니냐,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어떤 자리까지 승진하느냐 등이 핵심 성공 지표로 통한다. 단순히 경제적·조직적 기능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더 폭넓은 사회적·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한국의 대기업을 '초기업'이라고 부른다. 개인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위계의 빈자리는 그럼 무엇이 메웠나. 저자는 '구별'과 '참여'가 미묘한 긴장관계를 이루며 오늘날 한국 기업의 문화를 이루고 있다고 분석한다. 누군가는 성별이나 연공서열에 대한 우려 없이 개인의 기량과 성과가 적절히 구분되고 인정되는 '공정한 구별'을, 누군가는 나이와 역량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협력하고 소통하는 '동등한 참여'를 '탈위계'로 받아들인다는 것.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한 줄로 요약된다. "21세기 한국 기업의 사무직은 대규모 조직 내에서 개개인의 구별 짓기와 공동체적 협력 모두가 강화됐다." 어찌 보면 더 복잡다단해진 셈.
하여, 현실 세계에서의 적용이 간단치만은 않다. 한때 '수평적 문화'를 만들자며 직급과 직함이 아닌 '이름+님'으로 부르거나 '매니저' 등으로 통칭하는 정책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2014년 KT는 이를 도입한 지 2년 만에 다시 직급제로 돌아왔다. 성과나 승진에 따른 구별이 없어 직원들의 사기가 꺾이고 불만이 쌓였기 때문. 호칭만 바꿨을 뿐, 직원들의 문화적 습속을 살피지 못한 사례다.
권위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야근 강요 등 조직의 비생산성을 높이고 더 나아가 시대착오적인 회식을 좋아하는 '나이든 남성 관리자'는 건전한 참여를 방해하는 존재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사회의 낙오자가 아니라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에서 가장 선망하는 위치에 있다". 조직 내 세대갈등 이면엔 결국 '공정한 구별'과 '동등한 참여'의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책은 드라마 '미생'을 연상케 할 정도로 회사 생태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직원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사내 풋살팀에 가입하고, 회사 헬스클럽에 다니는가 하면 자신을 초대한 결혼식이나 회식 자리에 모조리 응하고, 업계의 마라톤 대회에도 참석하는 저자의 모습은 인간적이기까지 하다.
하나, 겉표지의 '함께 미래를 열어갈 한국 기업과 MZ세대를 위하여'라는 부제는 다소 마케팅 수사이지 않나 싶다. 책은 어디까지나 '민족지학적(현지조사에 바탕을 두고 사회조직이나 생활양식 전반에 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 연구물'임을 명심할 것. 직장 생활 처세술이나 HR 조직 관리 비법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뾰족한 결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 이같이 밝힌다. "나는 이 책에서 구별과 참여 사이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안타깝지만 애당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한국 기업을 '재벌'이라는 단선적이고 단편적인 인식틀로 바라봐 온 서구에는 신선한 시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영미권 사회과학 분야에서 한국 기업과 조직문화를 다룬 연구자는 2명뿐일 정도로 선행 작업이 빈약했다. 혹은 회사 생활 딜레마의 원인을 도통 찾기 어려운 한국 직장인이라면 이 외부인의 제3자적 시각에서 실마리를 얻을 법하다.
이혜미 기자 herst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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