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인 시크… ‘마약 미화’ 美대중문화, 10대를 망치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3. 4. 14.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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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중독자 사망 年10만명… 그뒤엔 마약 권하는 문화
미국의 최고 인기 드라마로 꼽힌 HBO '유포리아'의 한 장면. 10대 고교생들이 마약 등에 탐닉하고 각종 범죄에 빠져드는 내용으로, 2022년 2월 시즌2에서 주인공 루가 재활센터에서 쉽게 치료되는 내용을 담아 논란이 됐다. /HBO

“이곳 미술계나 패션계, 방송가 등에선 마약을 하지 않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 디자이너나 예술가에 대해 ‘예술성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시각이 있다. 음악계? 거긴 더하다.”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 패션 디자이너가 한 말이다. 트렌드의 첨단을 달리는 문화계에서 기호용 마약이 만연한 것을 넘어 권장되기까지 한다는 뜻이다. 미 연방정부가 연 409억달러(약 54조원)의 예산을 쏟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는데도 마약 중독이 급증하고 사망자가 10만명을 넘어선 배경엔,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마약 투약이 정상적이거나 멋진 일로 미화되는 추세가 강해졌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최근 가장 논란이 된 콘텐츠는 미 TV드라마 사상 최다 트윗 수를 낳았다는 HBO의 인기 드라마 ‘유포리아(Euphoria)’다. 2019년 처음 선보이고 지난해 ‘시즌 2′가 나왔는데, 제목 자체가 ‘극단적 희열’이란 뜻이다. 맥락상 마약 중독 상태를 뜻한다. 10대 고교생이 펜타닐 등 각종 마약을 섞어 투약하며 성적 탐닉과 범죄에 빠져든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진짜 미 10대들의 현실을 그린 사회물인지,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해 시청률을 올리려 과장한 연출인지를 두고 큰 논란이 일었다. 특히 주인공이 ‘좀비 마약’ 펜타닐에 중독된 뒤 재활센터에 들어가 회복·치료되는 내용이 지난해 방영되자 마약중독예방센터·존스홉킨스대 등 기관과 학계는 “10대의 마약 중독을 미화한다”고 비판했다. 실제론 펜타닐 같은 오피오이드(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돼 사망하는 24세 이하 청년 수는 2020년 6000명을 넘어서며 5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드라마처럼 쉽게 치료되지 못하고 약물 과용으로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

깡마르고 피폐한 분위기의 모델을 내세운 한 '헤로인 시크' 화보.

마약상을 주인공으로 하고 그 제조·유통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 미 드라마와 영화는 지난 몇 년간 반복해서 만들어졌다. 마약·마약상 같은 소재는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해 인기도 있다. 고등학교 화학 교사가 마약을 제조한다는 ‘브레이킹 배드’, 평범한 주부가 대마 공급원이 되는 ‘위즈’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 등 외국의 마약 공급책들이 이런 드라마를 보고 따라했다는 얘기가 돌 정도로 마약과 관련한 구체적인 묘사가 돼 있다. 2021년 시작돼 지난 1월 시즌 2가 나온 넷플릭스 시리즈 ‘지니 앤 조지아’에선 15세 여고생 주인공의 남자친구이자 그림에 재능 있는 잘생긴 고교생이 마리화나를 교과서 사이에 숨겼다 피우는 장면이 수시로 나온다. “친한 친구가 죽은 이후 마음의 문을 닫았다”면서 우수에 빠진 표정으로 대마초를 피우고 철학을 논한다. 이걸 압수한 어머니는 다른 여성과 육아 고충을 토로하며 그 대마초를 나눠 피운다. 미국에선 기호용 마리화나가 뉴욕 등 18개 주에서 합법이어서 어느 정도는 일상적인 장면일 수 있지만, 마약류 일체를 금지한 한국 같은 나라들에선 이런 장면들이 ‘선진 문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시민단체 미국중독센터가 최근 5년간 미 TV 에피소드 7만여 건을 분석한 결과, 마약을 소재로 삼은 장르는 코미디가 41%로 가장 많고 범죄물과 드라마가 각각 17%였다. “마약이 재미있는 개그 소재로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뜻이다. 패션계에선 ‘헤로인 시크(heroine-chic)’란 용어가 많이 쓰인다. 이는 미 패션 화보에서 많이 보이는, 깡마르고 퀭한 얼굴의 모델들이 화려한 클럽이나 밀실을 배경으로 몽롱한 표정이나 널브러진 자세를 한 모습을 뜻하는데 ‘마약중독자처럼 쿨하고 아름답다’는 뜻의 용어로 통용된다.

미 힙합·랩 등 팝 음악에서도 마약을 ‘쿨함’, 부(富)와 명예, 예술적 영감으로 연결시키는 표현이 규제 없이 넘쳐난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선 이런 가사가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 가수 비욘세의 남편이자 억만장자인 래퍼 제이-Z는 어린 시절 뉴욕 브루클린에서 마약을 팔다가 성공했다는 자전적 스토리를 ‘블루 매직’ ‘드럭 딜러스 어나니머스’ 같은 노래의 가사와 랩에 넣는 것으로 유명하다. 역시 미 10~20대에게 영향력이 큰 래퍼인 트래비스 스콧은 ‘앤티도트’에서 “일요일에 뽕파티, 월요일에 또 파티, 주말에도 돈 좀 썼지, 계속계속 이걸 할 거야”라고 한다. 1960년대 결성된 록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곡 ‘헤로인’은 “내 혈관에 이걸 흘려넣으면 내 자신이 남자처럼 느껴져, 예수의 아들처럼 느껴져, 헤로인은 내 와이프 내 라이프” 같은 가사로 마약을 미화했다.

실제론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인 마약이 문화 콘텐츠에서 멋진 기호품이나 장난거리처럼 다뤄지면서 마약을 통제하기 위한 미 정부의 막대한 예산 투입에도 마약 문제는 계속 악화하고 있다. 약물 중독으로 인한 미국 내 사망자 수는 2015년 5만3000명에서 2021년 10만8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미국 팝음악계의 파워커플인 비욘세와 제이-Z(오른쪽). 제이-Z는 뉴욕 브루클린의 마약상 출신으로 마약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었고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는 내용의 랩과 가사를 많이 써왔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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