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속 돈키호테 “풍차 향해 돌진, 처음 해봐요”
달빛 아래 숲속, 작은 유랑극단 무대 위에 공연이 한창이다. 사랑에 빠진 아름다운 남녀가 한껏 애틋해 할 때, 흉측한 악마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다. 보통 사람에겐 그냥 보고 즐기는 연극일 뿐인데, 문제는 돈키호테의 정신이 이미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것. 이 악마, 돈키호테 눈엔 꿈속의 여인 둘시네아를 납치해갔던 바로 그놈이다. 흥분한 돈키호테가 긴 창을 들고 돌격한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멀쩡한 풍차를 향해.<사진>
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국립발레단(단장 강수진)의 클레식 발레 ‘돈키호테’는 특별하다. 1869년 전설적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1818~1910)의 안무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처음 공연된 이 작품은 긴 세월 수많은 예술가와 무용수들을 거치며 이야기도 춤도 바뀌어왔다. 널리 알려진 버전은 세르반테스 소설 돈키호테 속 선술집 딸 ‘키트리’와 이발사 ‘바질’의 알콩달콩 경쾌한 사랑 이야기. 돈키호테는 두 젊은 연인의 사랑을 이어주는 역할로 잠깐 스쳐 지나간다.
“제목이 ‘돈키호테’인데 왜 정작 돈키호테는 무대에서 마임 정도만 하고 사라지는 걸까? 그런 생각이 출발점이었어요.”
이번 ‘돈키호테’ 공연의 재안무를 맡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송정빈은 최근 국립예술단체연합회 공연연습장에서 열린 작품 설명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2020년 전막 발레 ‘해적’을 재안무해 국립발레단의 새 레퍼토리로 안착시킨 신예 안무가. 관객도 무용수도 아쉬워했던 무대 위 돈키호테의 캐릭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도록 변화를 줬다. “집시촌에서 유랑극단으로 설정을 바꾼 1막 2장 ‘달빛 아래 숲속’에서 돈키호테가 풍차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풀어봤어요. 2막 1장 ‘돈키호테의 꿈’에선 젊은 시절로 돌아간 돈키호테가 꿈속의 여인 둘시네아와 아름다운 파드되(2인무)를 추며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11일 리허설을 통해 본 장면들은 송정빈의 말대로.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할 땐 그 눈에만 보이는 악마 무리를 남성 무용수 군무로 표현했다. 조금 더 역동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재안무 뒤 첫 공연인 걸 감안하면 충분한 ‘스펙터클’이다.
스페인풍의 화려하고 정열적인 춤과 의상, 키트리의 ‘캐스터네츠 솔로’, 바질과 키트리의 결혼식에서 펼쳐지는 그랑 파드되 등 많은 발레 팬들이 사랑하는 원작의 매력은 그대로 남겼다. 전체 3막을 2막으로 압축해 긴 시간 관람해야 하는 관객의 부담도 줄였다. 공연은 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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