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 국민연금의 존재 의의
국민연금 개혁 논란이 장기화되고 있다. 하도 시끄러우니, 차라리 안 내고 안 받겠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물론 홧김에 하는 말일 테다. 진심으로 국민연금은 폐지해야 한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팽배한 것만은 분명하다. 국민이 신뢰하고 만족하는 연금이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이를 위해서는 대체 국민연금이 왜 필요한지, 근본적인 존재 의미를 따져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는 공적연금에 반대했다.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그의 주장 중에는 경청할 내용이 무척 많다. 하지만 공적연금 반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반대 이유를 들어보자.
“공적연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민의 노후 생활 보장을 위한 국가 개입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의 가치를 존중한다면 개인들이 자신에게 해로운 선택을 할 자유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현재를 즐기는 데 자신의 소득을 모두 쓰는 대가로 궁핍한 노년을 감수하기로 했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것을 막을 것인가? 우리는 대화를 통해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설득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결정을 바꾸도록 강제할 권한은 없다. 공적연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만약 이 제도가 없다면 스스로 노후 대비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주장도 한다. 정부는 가난한 노인에게 공공부조를 제공한다. 이는 스스로 노후 대비를 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사회가 부담을 떠안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강제적인 연금 가입은 재원을 부담해야 하는 납세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만약 공적연금이 없는 상태에서 노령 인구의 90%가 사회에 부담이 된다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1%만이 부담된다면 그렇지 않다. 왜 1%의 사람들이 사회에 초래하는 부담을 막기 위하여 99%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가? 자발적인 노후 대비가 어려운 소수에게는 어느 정도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머지 다수에게는 스스로 노후 대비를 하도록 맡겨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프리드먼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의 말처럼 대다수가 알아서 노후 대비를 잘한다면 연금제도는 그다지 필요치 않다. 소수의 빈곤 노인만 공공부조를 통해 지원하면 된다. 문제는 알아서 노후 대비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데 있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기억할 것이다. 더운 여름날, 개미가 땀 흘려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띵가띵가’ 놀았다. 추운 겨울이 왔을 때, 식량을 넉넉히 비축해 놓은 개미는 편안했지만, 아무런 대책이 없는 베짱이는 굶주렸다. 결국 개미를 찾아갔고, 개미는 베짱이를 집 안으로 들이고 함께 겨울을 지냈다. 근면 성실을 훈계하는 이 우화를 국민연금 관점에서 따져보자. 추운 겨울에 굶주리는 베짱이는 여름날 농땡이 부린 것을 후회했을까 안 했을까? 프리드먼 교수 말처럼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면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후회했을 것이고, 주저하면서 개미를 찾아갔을 것이다. 한편, 원본을 보면 결말이 다르다. 원본에서는 개미가 베짱이의 요청을 냉정히 거절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게 현대에 와서 아동용으로 각색되어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개미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래도 친구이니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만, 도와주면서도 속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나 혼자 먹을 만큼만 비축하겠다고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공적연금이 없다면, 과연 알아서 착실하게 노후 대비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노인빈곤율 통계이다. 노인빈곤율에는 시장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과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한 것이 있다. 쉽게 말해서 시장소득은 공적연금과 공공부조를 뺀 소득이고 가처분소득은 이들을 포함한 소득이다. 통상 선진국으로 불리는 국가들은 이 두 기준 노인빈곤율 차이가 엄청나다. 요즘 연금 개혁으로 시끄러운 프랑스를 보면, 시장소득 노인빈곤율은 85%에 달한다. 하지만 가처분소득 노인빈곤율은 5% 미만이다. 물론 이를 근거로 연금이 없었다면 프랑스 노인의 85%가 빈곤했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장소득 빈곤율이 이처럼 높은 것은, 풍족한 공적연금의 존재로 인해, 별도로 노후 대비를 하는 사람이 적은 탓이다.
‘연금이 없었을 때의 노인빈곤율’을 파악하는 데는 우리나라 자료가 유용하다. 우리의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 노인빈곤율은 각각 60%와 40%이다(2020년 기준). 공적연금 덕에 빈곤율이 20%포인트 감소했다. 우리의 시장소득 빈곤율이 프랑스보다 한참 낮은 것은 공적연금이 빈약한 탓이다. 공적연금에 의존할 수 없으니, 스스로 노후를 챙기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물론 우리의 시장소득 빈곤율 60% 역시 온전히 연금이 없었을 때의 노인빈곤율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자료를 분석해 보면, 이는 시장소득과 가처분소득 빈곤율의 중간인 50% 정도가 될 것 같다.
정리하면, 연금제도가 없다면 많은 노인이 빈곤한 노후를 보내야 한다. 이는 노후 빈곤 방지야말로 연금의 존재의의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후 빈곤 방지 기능이 부실한 연금은 존재가치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공적연금의 노후 빈곤 방지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고, 그래서 우리의 노인빈곤율은 OECD 국가 중 톱이다. 많은 사람이 국민연금을 불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지속 가능성이 취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보장성이 매우 낮다는 것도 국민연금이 못 미덥고 불만족스러운 주요 이유가 된다.
국민연금 대상자인 일반 국민 사이에 국민연금 무용론 주장은 있지만, 공무원들이 공무원연금 무용론을 얘기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은퇴한 공무원은, 연금 대신 일시금을 택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후한 연금을 받는다. 은퇴한 선배들이 연금 덕에 얼마나 여유로운 노후를 즐기는지 잘 알기에 재직 공무원 중에 공무원연금 안 내고 안 받겠다는 사람은 없다. 글쎄, 공무원연금만큼은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정녕 국민을 위한 연금이라면 국민의 노후 걱정을 상당 부분 덜어줘야 마땅하다. 아니라면 존재의의가 없다.
김태일 고려대 교수·좋은예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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