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유대인 가문이 상하이를 세계적 도시로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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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 조너선 카우프만은 20대 때인 1970년대 신참 해외 특파원으로 중국 상하이에 처음 갔고, 천안문 사태가 터진 1989년 다시 상하이에 갔으며, 글로벌 경제 강국이 된 중국을 취재하기 위해 2002년 다시 상하이에 갔다고 '들어가는 글'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데 유럽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오스트리아 주재 중국 영사 허펑산 등의 큰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난민이 되어 밀려들었을 때 두 가문은 발 벗고 나서 동포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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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만장자 ‘서순’ ‘커두리’
- 19세기~20세기 일대기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 조너선 카우프만은 20대 때인 1970년대 신참 해외 특파원으로 중국 상하이에 처음 갔고, 천안문 사태가 터진 1989년 다시 상하이에 갔으며, 글로벌 경제 강국이 된 중국을 취재하기 위해 2002년 다시 상하이에 갔다고 ‘들어가는 글’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월스트리트 저널’ 중국 지부장 등을 지낸 그는 30년 가까이 중국 전문 기자로 활동했다.
조너선 카우프만이 쓴 ‘상하이의 유대인 제국’은 서순(Sassoon) 가문과 커두리(Kadoorie) 가문의 실화다. 두 유대인 가문은 어마어마하게 부유했다. 특히 격동기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 상하이에서 엄청나게 부유했다. 저자가 치밀하고 흥미롭게 전개(이런 점이 언론인이 쓰는 책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하는 이 책에서 두 가문이 상하이를 중심으로 거둔 이익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할 때 수억 달러, 수십억 달러, 수백억 달러라는 표현이 거침없이 나온다.
당시 두 가문이 일군 부 가운데 극히 일부만을 예로 들자면, 커두리 가문은 모든 홍콩 여행객이 동경하는 페닌술라호텔을 지금도 운영하며, 서순 가문의 빅터 서순은 20세기 초반 전설의 최고급 호텔로 군림한 상하이의 캐세이호텔을 소유했다. 서순 가문은 중국에 아편을 팔아 일어섰으며 HSBC 은행 설립도 주도했다. 이들의 경제 권력이 미친 권역은 상하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인도 홍콩 동남아 영국 등을 포괄한다. 서순 가문은 오스만 투르크의 심장부였던 바그다드에서 수백 년에 걸쳐 놀라운 부와 영향력을 누리다가 위기가 오자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두 가문이 상하이의 경제를 좌지우지한 시절은 격변기였다. 아편전쟁, 신해혁명,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홍콩 할양, 장제스의 국민당 패퇴, 마오쩌둥의 중국 본토 장악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기간 내내 상하이는 세계에서 가장 활력 넘치고, 부유하고, 번성한 도시 반열에 있었다. 상하이, 그리고 중국은 두 가문이 이룬 부의 원천이었던 동시에 두 가문은 상하이를 세계 도시로 밀어 올린 중대한 힘이었다.
두 가문은 식민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두 가문의 주요 인물 가운데 누구도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런데 유럽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오스트리아 주재 중국 영사 허펑산 등의 큰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난민이 되어 밀려들었을 때 두 가문은 발 벗고 나서 동포를 도왔다. 많았을 때 상하이의 유대인 난민은 1만8000명에 이르렀다. 커두리 가문의 주역이었던 로런스와 호러스는 그 시절 홍콩에서 곤경에 빠진 가난한 중국인을 힘껏 도왔다.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로런스는 부친 엘리 그리고 가족과 함께 4년 동안 수용소에서 지냈다.
이 책은 유대인 그리고 부자를 중심에 놓고 격동기에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치밀하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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