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우는 나무
홀로 취한 것도 죄가 될까
떠다니는 말들이 아문 상처까지 헤집어
스스로 빚어 올린 독에 갇혀 꽃 한송이 피운다
이따금 누군가 간절하지만
갈마드는 덴 가슴
꽃그늘처럼 떤다
심연에서 만나기로 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을 걸 알기에
어둠에 깍지를 끼고
깨물어서 아플 손가락은 잘라냈다
용서라는 꽃말 덧덮으며
또다시 엎드려 물줄기를 잇는다
무릎을 껴안다 얼굴마저 파묻고
젖은 흙, 빈 몸뚱이를 쓰다듬는다
옅은 잠귀
날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
떨어진다
잠깐만 한눈팔아도 꽃받침에
거미줄이 보이고 뒤돌아 앉으면
이끼가 낀다 밤에서 밤으로
멍 자국 숨기며 새가 난다
- 이동우 시 ‘용서를 강요받을 때’,
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
한 달째 절뚝거린다. 왼쪽 엄지발톱이 살을 파고드니 살과 발톱 사이에 ‘U’자형 밴드를 붙이고 다닌다. 오른쪽은 말짱한데 왼쪽만 말썽이다. 내성발톱이란다. 어릴 때 친구들이랑 숨바꼭질하다 벽장 문짝이 떨어지는 바람에 생긴 흔적이다. 모서리에 찍힌 발톱은 시꺼멓게 멍들더니 결국 빠지고 새로 돋았지만, 50년이 지나서 안으로 파고든다. 상처는 힘이 세다. 이쑤시개보다 작은 환부조차 이리 쑤셔댄다. 아리다.
절뚝이며 대구의 ‘공간 7549’에 다녀왔다. 그곳은 ‘인혁당 재건위’란 이름으로 사형판결을 받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8명,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우홍선, 김용원, 이수병, 여정남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조작과 고문으로 만든 그 사건으로 옥사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운명한 무고한 희생자는 24명. 1975년 4월9일, 오전 6시쯤 넘겨받은 이수병 선생 시신엔 “등이 다 시꺼멓게 타” 있고, “손톱 10개,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있고”, “발뒤꿈치는 시꺼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다”. 구속 후부터 사형이 집행된 1년 동안 가족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수병씨만 착한 교도관의 배려로 구치소 마당에서 등에 업힌 딸을 멀리서나마 한순간 보게 해주었다는데, “어, 많이 컸네. 많이 컸네”가 그가 남긴 유일한 말이란다.
‘7549’로부터 48번째 봄이다. 사법 살인으로 불귀의 길을 떠난 ‘7549’의 아이들이 자라 50줄이 되었다. 연좌제에 묶여 이끼처럼 음지로 숨어다녔을 밤의 행로였겠다. 화상 자국으로 덧난, ‘덴 가슴’이었을 게다. 영문도 모른 채 안 보이는 아빠가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가 들렸겠다. 깍지 끼고 어둠 속에 앉아 “무릎을 껴안다 얼굴마저 파묻”었겠다. “떠다니는 말들이 아문 상처까지 헤집”고, 용서를 강요받으며 “꽃말 같은 용서를 덧덮으며”, “밤에서 밤으로/ 멍 자국 숨”기며 파닥거렸을 게다.
‘공간 7549’에서 몇 발자국 떼자 회화나무가 높이 솟아있다. 동학 초대교주 최제우가 참형당하자, 목놓아 울었다는 일명 ‘최제우 나무’다. 이 나무는 키가 커서 감영에서 고초를 겪는 걸 다 지켜봤다는 거다. 1864년 봄, 경상감영에서 끌려나와 감영 앞 관덕당 뜰에서 죽어갈 때, 광풍이 불고 폭우가 내리고, 나무가 잎을 떨어뜨리며 수액을 눈물처럼 흘렸다는 거다. 기부 카페 ‘모디’ 대표이자 비영리단체 ‘전태일의 친구들’에서 일하는 김채원의 말이다.
상처만큼이나 이야기는 힘이 세다. 비통함이 크고 비원(悲願)이 깊을수록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민초들도 참 힘이 세다. ‘공간 7549’ 위층에서 디자이너 배은경이 커피봉지마다 노란 리본을 붙이고 있다. 기억은 힘이 세다. ‘4·16 세월호’로부터 벌써 아홉 번째 봄이다.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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