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경성모던
식민지 조선의 중산층과 부자에게 빵은 낯선 식료품이 아니었다. ‘조선일보’ 1927년 9월7일자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침에는 밥 대신에 우유와 빵을 먹고 가겠다고 한다”는 사연과 함께 “식빵의 좋고 나쁜 것을 아는 법”을 다루었다. 조선의 라디오 방송과 신문과 잡지는 식빵·샌드위치·프렌치토스트·토스트샌드위치 만드는 법, 빵에 잼·버터·우유·커피·홍차 등을 곁들여 한 끼 제대로 먹는 법을 싣고 또 실었다. 이런 정보는 대도시 유복한 가정의 주부와 학생에게 쓸모 있는 정보였다. 부잣집 도련님은 ‘빵투정’도 했다. 반찬 시원찮은 밥상 앞에서 벌이는 밥투정과 매한가지다. 샐러드나 맛난 잼 또는 버터가 있어야 제대로였다. ‘조선의 수부(首府)’ 경성(京城), 일본말로 게이조(けいじょう) 한복판에서 커피와 토스트샌드위치로 늦은 점심을 때우는 회사원이 등장하는 소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오늘날의 서울 풍경 그대로다. 여기까지가 요식업, 영화, 연속극, 문학 등이 식민지 풍경을 ‘레트로 디자인’으로 축소/재현하는 원인이겠다. ‘경성’ ‘모던’을 내건 식당, 식민지 조선의 선남선녀가 ‘런치’를 먹겠다고 경성을 누비는 장면도 쓸 만해서 썼겠다. 하지만 빵과 샌드위치와 토스트샌드위치의 식도락을 즐긴 조선 사람은 극소수였다. 빵은 서민대중이 쉬이 누릴 수 있는 먹을거리는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에서 제빵제과자업을 독점한 일본인 종사자는 조선인을 허드렛일에만 부렸다. 기술 전수는 없었다. 오히려 만주로 간 조선인, 일본에 들어간 조선인에게 어쩌다 기술 습득의 기회가 생겼다. 이들이 해방 후 한국 제빵제과의 1세대를 이룬다.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제빵제과의 시작은 해방 후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방은 제빵제과의 역사에서도 해방이다. 그러고 보니 ‘개벽’ 1925년 새해 특집의 한 꼭지가 가슴을 콕 찌른다. 나무꾼에서 식모, 지게꾼에서 공장 노동자에 이르는 노동자를 인터뷰한 이 꼭지에는 종로 네거리의 엿장수 최성오의 목소리 또한 실렸다.
“더구나 우리 엿장수들은 그놈의 왜떡, 양과자 바람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중략) 음력정초면 강정 같은 것을 만들어도 엿을 사 가고, 세찬으로도 사 가며 (중략) 따라서 엿방도 많고, 엿장수도 많이 있더니 근래에 외국 과자, 떡 등속이 나온 뒤로는 아주 아니 팔립니다. (중략) 아무튼 왜떡, 양과자 등쌀에 못해먹겠습니다.”
‘못해먹겠다’로 다가 아니라, 엿장수는 제빵제과에 조선 기술자가 껴들 수 없어 울분이 끓었다. 그때 엿이 양과자를 만날 틈, 전통 한과가 새 기술과 경영의 측면에서 제빵제과를 감각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교실에서 제빵제과를 익힌 여학교 출신들은 산업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그간 만들고 먹어온 한과의 일상은 산업과 관계를 맺는 데서 식민지 시기 내내 실패했다. 일상에 잇닿은 산업은 ‘재조선(在朝鮮)’ 일본인이 장악하고, 허드렛일뿐인 조선인에겐 내일을 꿈꿀 여지가 없다. 제빵제과 역사에서도 식민지 시기는 껄끄럽다. 보이는 게 다인 ‘레트로 디자인 경성’에는 아무래도 신뢰가 안 간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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