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광주여, 생명이여

기자 2023. 4. 1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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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은 상극이자 상생이다. 며칠 전 강릉의 화마를 잡은 것도, 타들어가는 대지에 새 생의 봄을 일깨운 것도 밤새 내린 비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 큐레이터

노자는 “천하에 물보다 유약한 것도 없지만, 견고하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 물을 능히 이기는 것은 없으니, 물이 견강한 것을 쉽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天下莫柔弱於水, 而功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라고 갈파하고 있다.

지금 광주에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를 주제로 14번째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전시는 깜깜한 동굴로 들어가면서 열린다. 곧바로 문명의 시원을 마주하는데, 하늘과 땅을 내왕하는 무수한 밧줄은 세계수이자 생명의 나무로 다가온다. “이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며, 땅이 우리를 치유하는 힘을 선물로 내어 줬음을 깨닫는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암스테르담과 케이프타운에 거점을 두고 문명의 원점을 노래하는 블레베즈웨 시와니가 당사자다. ‘옐라무야 옐라무야…’ ‘귀를 기울이면 우주가 열리는 소리로 가득하고, 붉은옷의 검은’ 여인이 먼 바다를 응시한다. 태초의 생명 기운이 전시장은 물론 광주 땅에 넘실댄다.

벽면에서 벌인 이승애의 씻김굿판이나 팡록술랍의 목판 연작은 저항의 5·18을 생명으로 승화시켜내고, 김순기의 ‘광주. 시詩’는 조선과 근대를 접어 진정한 미래 주인이 여성임을 선언한다.

베티 머풀러의 ‘나라를 치유하다’는 필획(筆劃)에 의한 무수한 동심원의 연속이다. 한국의 천전리와 양전동 선사 암각화의 추상문양을 여기서도 마주하는데, 1950년대 영국의 핵실험으로 후유증을 겪고 있는 호주 원주민을 태고의 영기(靈氣)로 치유해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전시는 다분히 반문명적이다. 여기에 대해 뉴욕을 기반으로 하는 독립 큐레이터 김유연과 잉크스튜디오 감독 크레이그 예는 “강함에서 유약함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서구문명의 대세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지구라는 행성의 삶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선제적으로 통찰하고 제시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태고, 역사 전통, 아프리카, 땅, 여성, 결핍, 트라우마 같은 가치들은 고도의 문명을 누리는 자들이 판단하기에 유약하고 무용하기 그지없지만 이런 음지의 생각과 존재들이 다시 호출되는 것이 오늘날 기계시대의 역설이다.

노자가 “옛 도(道)를 잡아 오늘의 오만가지 일을 제어하면 태고의 시원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을 일러 도(道)의 벼리라고 한다(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고 일러준 대로다. 여기서 광주는 바로 아시아를 넘어 지구라는 행성에서 새 생을 잉태하는 벼리의 땅으로 도약한다. 30여년의 역사를 거듭하는 가운데 이번 14번째 비엔날레의 화두를 유약(柔弱)으로 잡아내면서 광주의 정체성과 세계성을 대내외에 발신해내고 있다.

지금 인간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챗GPT 인공지능, 핵과 같은 기술문명의 진화에 대한 두려움이다. 정치적으로도 여야 대립과 남북 갈등에다 한·중·일과 미·중의 얽히고설킨 역학관계가 우리의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명의 이기(利器)나 혼돈의 정치는 우리의 생각을 태고의 시원으로, 문명의 자궁으로 되돌릴 때만이 해결의 기미가 보인다. 광주는 이런 가르침을 무언(無言)으로 꽃을 들어 보여주고 있다.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와 타이키 삭피싯의 ‘스프릿 레벨’과 같은 작품은 강자의 폭력성을 희비(喜悲)가 뒤섞인 고도의 메타포로 고발해낸다.

하지만 그들마저 품어내고 마는, 결핍되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자의 마음을 형상화해내는 데 방점이 찍힌다. 전시장 밖에서는 청년 전우원이 코트를 벗어 5·18 영령의 묘비를 닦아 차디찬 돌에 온기(溫氣)를 돌려내고 있다.

유약이 강강(强剛)을 기억하고 이겨낼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광주여! 생명이여!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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