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語西話] 염전마을에서 소금커피를 주문하다

원철·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2023. 4.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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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찾아 천리 길을 마다 않고 새벽길을 나섰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소금이 아닌 까닭이다.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 창건과 역사를 함께 한 일천오백년 시간이 녹아 있는 소금이다. 당시 대규모 사찰을 지으면서 건축주 검단(黔丹)대사가 봉착한 문제는 기존 터에 살고 있던 원주민의 이주 문제였다. 더불어 생계 대책도 세워야 했다. 고심 끝에 바닷가로 이주시켰고 소금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 당나라에서 수행하던 시절에 배워 둔 것이다. 사하촌이 된 검단포(黔丹浦)에서 수확하는 첫 소금을 해마다 큰법당에 올리는 ‘보은염(報恩鹽·은혜에 보답하는 소금)’은 지역사회와 절집이 상생(相生)한 결과였다.

선운사 진산식(晉山式·주지 취임식)에 참석한 뒤 그 마을을 찾았다. ‘검단소금전시관’이란 안내판을 이정표 삼아 들어가니 ‘사등마을 자염체험관’ 건물이 보인다. 본채는 물론 주변까지 제대로 공사를 마치지 못한 탓에 다소 어수선하다. 사등(沙登)은 모래언덕을 말한다. 동네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포장된 길 위에도 모래가 풀풀 날린다.

자염(煮鹽)은 바닷물을 장작불로 끓여서 만든 소금이다. 그래서 화염(火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가마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닷물의 염도를 높이기 위해 수많은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야 땔감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소금 구덩이였다. 선운사 역사를 기록한 ‘도솔산고적책(兜率山古蹟冊)’에는 “검단포유염정시사지소착(黔丹浦有鹽井是師之所鑿)·검단포에는 소금 구덩이가 있는데 이것은 대사께서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염정(鹽井)은 염도를 높이기 위해 바닷물을 저장하던 구덩이로 지역민들은 ‘섯구덩’이라 불렀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선 수많은 구덩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1926년 무렵 육당 최남선(1890~1957) 선생은 이 지역을 유람하면서 주변 풍광을 묘사한 글을 ‘심춘순례’에 남겨 두었다. “야영(野營)같이 산재한 염막(鹽幕)을 보면서…검모포진(黔毛浦鎭)에 당도하니.” 군 부대가 야영을 위해 들판에 임시로 쳐놓은 천막처럼 해안가를 따라 소금 생산을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많은 막사를 눈에 담으면서 검모포진에 도착했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검단포는 물론 인근 마을 해안까지 소금생산지가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간 것을 알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에는 천일염 제조법이 보급되면서 간척을 통한 대규모 염전이 조성되었다. 평야만큼 넓은 염전에서 대량 생산되는 소금보다 더 비싼 자염(화염) 제조 방식은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하나둘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전통 소금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높아지면서 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옛 지명인 검단포와 검모포진은 이후 검단리 혹은 검당마을로 불렀다. 현재 도로명은 검당길로 표기했고 외지 손님의 발길이 잦은 인기 가게의 간판은 커다랗게 ‘금단00′라고 썼다. 검단 대사의 이름은 필요에 따라 앞 글자와 뒤 글자가 수시로 바뀌는 변주를 거듭해 왔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 부안군 곰소염전 어귀에 있는 유명 빵집카페에 들렀다. ‘소금커피’를 주문했다. 소금 역시 또 다른 변주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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