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LMO 주키니 호박, 악마의 유혹이었나

기자 2023. 4. 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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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과 짬뽕에 들어가는 설겅설겅한 푸른 호박이 ‘돼지 호박’이라고 부르는 ‘주키니 호박’이다. 애호박과 달리 과육 중심부까지 단단하고 씨앗이 없어 짜장밥이나 볶음밥에 넣는 용도로 알맞아서다. 어릴 때 엄마가 짜장밥을 해줄 때 넣던 호박이어서 시장에서 주키니 호박을 집어들면 별식인 짜장밥을 해준다는 신호여서 내겐 추억의 ‘짜장 호박’이다. 주키니 호박은 가정용으론 소비가 많지 않아도 식당이나 급식시설, 가공식품업체 같은 곳에서 대량 구매가 많은 채소다. 이런 주키니 호박이 지금 사람 속도 썩이고 저도 썩고 있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지난달 26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주키니 호박 씨앗 2종이 우리나라에서 승인되지 않은 유전자변형생물체(LMO)라며 거래와 출하를 갑자기 중지시켰다. LMO는 많이 들어본 GMO(유전자변형식품)다. 주키니 호박 출하가 한창인 데다 방역 조치도 풀려 외식수요도 높아진 때, 이미 따놓은 호박을 그대로 멈추라 하니 농민들은 어이없고 시장도 혼란에 빠졌다. 농가가 선택한 주키니 호박 종자가 LMO인지 아닌지 판정 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 했다. 하지만 호박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어 야속하게 쑥쑥 잘도 자랐다. 주키니 호박 출하가 막히자 대체품인 애호박 쪽으로 소비가 쏠려 애호박값이 오르고, 이웃사촌 오이 가격도 함께 뛰어 사 먹는 사람도 괴로웠다. 전국의 주키니 호박 생산농가는 500여곳. 그중 생산량의 61%가 경남에 몰려 있다. 경남의 농가들이 얽혀 있으니 지역 정치권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흩어져 있는 타 지역 농가는 물어볼 곳도 마땅찮아 우왕좌왕이다. 지난 3일부터 LMO 종자가 아니라는 판정을 받은 주키니 호박 출하가 재개되었지만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바닥 값인데다 소비자들은 먹어도 되나 싶어 뜨악하다.

강원 홍천의 한 농민은 문제가 된 홍익바이오의 ‘가야금’ 종자로 5년간 주키니 호박 농사를 지었다. 5년 정도면 관록이 붙을 때다. 올해도 씨앗 9봉지를 사서 모종을 길러 3000평 밭에 4500주의 주키니 호박을 심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국립종자원에서 모종을 모두 가져가 폐기했다. 큰일이라며 가져가더니 이후 별말 없어 농민이 여기저기 항의 끝에 종자회사에서 씨앗 9봉지 값과 모종값 일부만 돌려받았다. 모종 기른 시간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작물에 맞게 밭의 틀도 잡아 놓았고 모종을 심어 가꾸면 되는데 갑자기 다른 농사를 궁리해야 하니 골치였다. 깨나 잡곡으로 바꾼다고 한들 5년간 손에 익은 작물도 주키니 호박이었고, 타 작물 시장은 어떤지, 판로는 뚫을 수 있을지 소주 한 병 마시며 고민하다 결국 주키니 호박으로 다시 돌아가노라며.

호박은 ‘흰가루병’이라는 바이러스병이 골치다. 이파리에 밀가루를 뿌린 듯 흰가루가 내려앉아 작물 전체가 메말라버린다. 홍익바이오의 ‘가야금’과 ‘대금’ 주키니 호박 종자가 이 병에 강하게 육성된 품종이다. 2015년 당시 농민들이 주요 독자인 농업 매체와 지방의 공영방송에서도 ‘가야금’ 종자를 친환경농업이 가능한 종자라며 잔뜩 띄웠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내병성이 강한 호박품종 개발을 지원했고, 홍익바이오라는 회사와 강원도농업기술원, 경희대가 공동연구를 수행한 ‘쾌거’여서 농민들은 믿었다. 정부까지 나서 만든 종자이니 신원보증이 확실하지 않은가. 홍천의 농민은 강원도농업기술원을 믿었고, 열 번 칠 살균 농약을 두 번만 쳐도 잘 자라는 ‘가야금’ 종자도 매력적이었다. 농약 치는 일은 농민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일이며 땅의 건강도 해치는 일이다.

그런 농약을 여덟 번이나 줄였으니 주키니 호박 종자 ‘가야금’, ‘대금’은 끝내 악마의 유혹이었나. 이번 사태는 민간 종자회사가 유전자변형 씨앗을 몰래 들여와 국가의 돈까지 끌어다 2015년부터 농민들에게 잘 팔아먹은 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썩은 것은 창고에 쌓인 주키니 호박만은 아닌 것 같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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