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석] '美 도청 의혹' 파문, '가해자 두둔'이 보편적 가치인가
한미, 엇갈린 해명에 의혹 증폭…외신 "한국 정부가 사안 축소"
[더팩트ㅣ허주열 기자]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맹국 도청 의혹이 담긴 미국의 기밀문서가 유출된 이후 논란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대통령실 대응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상당합니다.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의혹에 대해 '피해자'인 한국 대통령실이 '가해자'인 미국 편을 드는 묘한 메시지를 잇달아 내놨기 때문입니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와 대통령실 메시지가 엇갈린 것은 이런 지적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NYT)의 지난 7일 보도를 시작으로 미국 현지에서 이번 의혹이 제기된 이후 대통령실의 메시지만 보면 실제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NYT에 따르면 SNS를 통해 확산된 100여 건의 미국 정보당국 기밀문서에는 김성한 전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전 외교비서관이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눈 내용 등 한국 관련 문건이 최소 2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관련 NYT는 "이 기밀문서는 '시긴트'(SIGINT, 신호정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이 아시아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한국)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외교 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국발로 보도되기 시작한 이후 이번 의혹에 대한 대통령실의 입장은 9일에 처음 나왔습니다.
당시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미 정보기관이 한국 정부 감청을 했고, 이를 미국 국방부가 시인하고 조사에 들어간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 입장이 일단 궁금하고, 미국 측에 뭔가 항의의 표시를 하거나 아니면 진상 파악을 위한 상세한 설명 등을 요청했는지, 아니면 할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관련한 보도를 잘 알고 있고,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 미국 측과 '필요한 협의'를 할 예정"이라며 "과거 전례,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한 번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장 '항의'를 해야 할 사안을 '필요한 협의 예정'이라고 한 것에 대한 비판이 나왔습니다.
또한 이 관계자는 '유출된 기밀문건에 담긴 우리 정부 고위 관료들의 대화가 실제 있었던 게 맞는가'라는 질문엔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라며 "그 사안에 대해서 확인한다기보다는 우크라이나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들이 있고, 그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엉뚱한 답을 내놨습니다.
다음 날(10일) 이 관계자는 다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미국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미국 국방부도 법무부에 조사를 요청한 상황이고, 사실관계 파악이 가장 우선"이라며 "유출된 자료 일부가 수정되거나 조작됐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고, 특정 세력의 의도가 개입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양국의 상황 파악이 끝나면 우리는 '필요할 경우' 미국 측에 합당한 조치를 요청할 계획"이라며 "이 과정은 한미동맹 간에 형성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과장하거나, 혹은 왜곡해서 동맹 관계를 흔들려는 세력이 있다면 많은 국민들로부터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근거는 제대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청와대보다 용산 대통령실 보안·안전이 훨씬 더 튼튼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하루 만에 대통령실의 입장은 미국 측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이달 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의제 조율 등을 위해 11일 미국으로 출국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공개된 정보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데 대해서 한미의 평가가 일치한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날 대통령실은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며 "앞으로 굳건한 '한미 정보 동맹'을 통해 양국의 신뢰와 협력체계를 보다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더니 하루 만에 제기된 의혹을 전면 부인한 셈입니다. 그러나 근거는 제대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상당수가 위조됐다'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최소한 '일부는 진실'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 법무부의 조사가 진행 중이고, 결과도 나오지 않았는데 "도감청 의혹은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이라고 밝힌 납득할 만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 장관은 현지 기자회견에서 "이번 기밀문서 유출을 매우 심각하게 보고 있다"며 "출처와 유출 범위를 밝히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대통령실 발표와 결이 다른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실은 미 정보기관의 도청 논란이 일단락됐다고 내부적으로 평가하고, 더 이상 외교적으로 미국 측에 문제 삼지 않을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와 관련 김태효 1차장은 11일(현지시간) 미국에서 기자들과 만나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가지고 (도감청을)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종합하면 미국 측은 이번 사안은 일부가 조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심각하게 보고 있다고 하는데, 정작 피해자인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더 강하게 "문제가 없다"고 하고 있는 셈입니다. 도청 피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대통령실이 왜 가해자인 미국 정부를 변호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런 의혹이 제기됐을 때 '보편적 가치'와 '국익'을 늘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라면,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는 동맹국 도청 의혹에 엄중히 항의하고, 이를 주장하는 야당 및 국민들의 의견을 지렛대 삼아서 다가오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추가로 결과물을 얻어내는 게 국익을 위한 상식적인 대응이 아니었을까요.
대통령실의 대응에 미 NYT, CNN, 영국 가디언 등 주요 외신들이 "유출 당사국인 미국조차 문건의 진위 여부에 대해선 공식 언급을 꺼리는 상황인데, 한국 정부가 관련 문건이 '위조'라는 단정적 표현을 사용했다"며 "한국 정부가 관련 사안을 축소하려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은 뼈아픈 지적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대통령실이 "대통령실 내 도청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의혹이 제기된 만큼 철저히 점검하겠다. 또한 미국 측의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되면 엄중히 항의하고 재발방지책 마련을 요구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냈다면 국민들의 신뢰 제고 및 의혹 해소에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두둔하는 듯한 해명, 근거가 부족한 해명으로 국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sense83@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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