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경제위기·민생 시급한데 재정준칙부터 서둘 때 아니다
윤석열 정부가 재정준칙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재정준칙은 국가채무나 재정적자 같은 국가 재정건전성 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규범을 일컫는다.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을 국내총생산(GDP) 3% 이내로 관리하되 국가채무비율이 GDP의 60%를 초과하는 경우엔 적자 비율을 2% 안으로 막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강화하고 운영 투명성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제가 어려운 때 재정을 옥죄면 복지가 줄어 민생이 더욱 피폐해진다. 수출·내수가 모두 얼어붙어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땐 오히려 재정 지출을 늘려 경제에 마중물 역할을 하게 해야 한다.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정부 부채가 늘긴 했지만 한국의 재정은 튼튼하다. 국제통화기금(IMF) 통계를 보면 주요 20개국(G20)의 부채 비율은 GDP 대비 128.7%(2021년 기준)인 반면 한국은 51.3%이다. 특히 총부채에서 자산을 뺀 순부채로 따지면 20.9%이다. 기획재정부는 재정준칙이 필요한 근거로 세계 90여개국이 이 제도를 운용 중인 점을 내세우지만 각 나라의 처지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남미 국가들은 채무 규모가 매우 크다. 유럽 국가들은 유럽연합 출범 과정에서 각국의 재정 정책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재정준칙이 필요했다.
기재부는 재정준칙 도입에 앞서 정확한 세수 추계 능력부터 갖춰야 한다. 지난해 추가경정예산 편성 당시 세수는 기재부가 예측한 것보다 53조원이나 많았다. 본예산 대비 15%가 넘는 오차율이었다. 그 전인 2021년에는 61조원의 오차가 났다. 이런 엉터리 세수 예측으로는 재정준칙이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정부가 진정으로 재정 건전성을 우려한다면 증세를 통해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부터 추진해야 한다. 지난해 정부·여당은 ‘부자 감세’ 지적에도 법인세 인하와 종합부동산세 감면 정책을 폈다. 이로 인해 올해부터 2027년까지 매년 17조6000억원의 세수가 줄어든다. 최근엔 아파트 공시가격을 낮춰 부동산 세금을 깎았고, 반도체 기업 등의 설비투자에 세액공제를 늘려주는 ‘K칩스법’으로 내년 한 해만 3조6500억원의 세금을 줄여줬다. 걷을 수 있는 세금까지 포기하면서 재정준칙 운운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지금은 재정준칙을 서두를 때가 아니다. 재정 축소는 경기 회복을 늦추고, 복지·교육 등 공공투자를 가로막아 불평등과 양극화를 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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