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뉴스타파>아직도 세월호 침몰이 미스터리라 믿는 당신에게

김성수 입력 2023. 4. 13. 20:35 수정 2023. 4. 2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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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9주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날 세월호가 어떻게 쓰러져 침몰했는지에 대한 공인된 설명을 정립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실상 마지막 국가조사기구인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지난해 활동을 마치면서 “외력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외력이 침몰 원인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애매모호한 결론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조선해양 전문가들과 세월호 참사 연구자들은 2018년 선체조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과학적·합리적 설명이 대부분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그 설명이란 어떤 것인지, 그럼에도 아직껏 적지 않은 이들이 세월호 침몰 원인을 ‘미궁’으로 여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취재했다.

세월호, 쓰러질 준비가 되어 있던 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쓰러져 침몰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 이전의 세월호가 어떤 배였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도입한 중고선이었다. 일본에서의 선명은 ‘파도 위’라는 뜻의 나미노우에호. 1994년 4월 마루에페리사가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조선소에서 만든 카페리선이었다. 

▲ 세월호의 전신인 나미노우에호와 운항 경로

나미노우에호는 여객과 화물을 싣고 가고시마와 오키나와 사이를 왕복 운항했다. 2011년 마루에페리사는 나미노우에호의 운항을 선령 18년차인 2012년 9월에 종료하기로 하고 신형 여객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미노우에호를 중고선박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

이 낡은 배를 사겠다고 나선 것은 청해진해운이었다. 이미 2003년에도 마루에페리사가 14년을 운항한 중고선을 사들인 적이 있었다. 청해진해운은 이 배를 개조한 오하마나호를 1주일에 3차례씩 인천과 제주 구간에서 왕복 운항시키고 있던 상태였다. 

▲ 청해진해운이 2003년 일본에서 중고선으로 매입해 개조한 '세월호의 쌍동이배' 오하마나호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를 사들여 인천-제주 항로에 추가 투입해 매일 왕복 운항이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경쟁사가 이 항로에 뛰어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서 방어할 방법이 필요했던 터였다. 마침 이명박 정부가 그때까지 20년이던 연안여객선의 선령 제한을 30년으로 완화시켜 줬다. 나미노우에호를 146억 원에 사들여 10년 이상 운항하면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판단했다. 청해진해운은 나미노우에호 매입을 결정한 2011년부터 여러차례 임직원들을 일본에 보내 배의 상태를 살피며 개조 방향을 논의했다.

▲ 청해진해운이 증축하기로 한 나미노우에호의  4,5층 객실

2012년 10월 8일, 당시 오하마나호 선장이던 이준석과 1등 항해사 신보식이 일본에서 나미노우에호를 몰고 한국으로 왔다. 그때 일본 선사의 항해사는 나미노우에호가 4번, 5번 평형수 탱크는 늘 채우고 다녔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온 배는 곧장 전남 영암의 CC조선에서 개조 공사에 들어갔다. 선수 오른편 카램프(화물칸 출입문)를 철거하기로 했다. 선수 갑판에 컨테이너를 더 많이 싣기 위해서였다. 선미 4층과 5층에 객실을 증축하기로 했다. 더 많은 승객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장에서 개조 장면을 지켜보던 신보식 항해사는 안기현 공무이사에게 우려를 전했다. 오른쪽 카램프를 철거하면 배의 좌우 균형이 틀어지고 객실 층축은 배의 무게중심을 높여 복원성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 이사는 “위에서 하는 일”이라며 일축했다. 이 배의 새 이름도 ‘위’의 결정에 따라 세월호로 붙여졌다. 개조가 끝난 뒤 한국선급이 승인한 완성복원성 계산서에 따르면 세월호의 무게중심은 신보식의 우려대로 일본에서보다 51cm 높아졌다.

▲ 2013년 2월 개조를 마친 세월호의 모습

2013년 3월부터 세월호 운항이 시작됐다. 선장은 이준석이었다. 신보식 1등항해사는 견습선장으로 동승했다. 5개월 뒤 이준석이 정년퇴임하면 신보식이 선장직을 이어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몇 차례 운항 만에 신보식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무게중심이 51cm 높아진 배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기울어지고 너무 늦게 복원됐기 때문이다. 신보식은 이준석에게 4번, 5번 외에 2번 평형수 탱크도 항상 채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배의 복원성은 그다지 좋지 않게 느껴졌다.

▲ 세월호 무게중심 높이 변화

이유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감사원의 감사 결과, 한국선급이 승인해준 세월호의 무게중심 계산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오류를 바로잡으면 무게중심은 일본에서보다 62cm 높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무게중심을 계산하는 과정이 엉터리였던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 목포 삼학도 부두에서 경사시험을 진행 중인 세월호

세월호는 2013년 1월 28일 목포 삼학도 부두에서 경사시험을 진행했다. 경사시험은 새로 만든 배나 세월호처럼 개조를 많이 한 배의 경하상태(배가 텅 빈 상태) 중량과 무게중심 높이를 측정하는 절차다. 배에 아무 것도 실리지 않은 상태일 때의 무게중심을 알고 있어야 얼마나 무거운 중량물을 어느 높이에 싣느냐에 따라 최종 무게중심을 계산해낼 수 있다. 이것이 실제 배의 복원성을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세월호는 경사시험을 받을 당시 아직 개조 공사를 다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 설비들은 아직 장착되지 못했고 나중엔 치워져야 할 각종 공사 장비와 쓰레기 등이 선내 곳곳에 들어차 있었다. 배 밑바닥의 연료와 평형수 등 액체류 탱크들도 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 미완성 선박의 경사시험 방법

이렇게 미완성 상태인 배도 경사시험을 할 수는 있다. 일단 경사시험을 실시해 무게중심 높이를 구한 뒤 미탑재물(원래 있어야 하는 중량물)과 추가 탑재물(원래 없어야 하는 중량물)을 보정 계산하면 텅 비어 있는 완성 선박의 무게중심을 산출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경사시험을 하기 전에 미탑재물과 추가 탑재물의 중량과 위치(높이)를 일일이 측정해 기록해 둬야 한다. 특히 배 밑바닥에 위치한 평형수와 연료, 청수 탱크 속 액체류의 중량은 조금만 다르게 측정되어도 최종 보정 계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세월호의 경사시험을 주관한 것은 청해진해운의 용역을 받은 신성선박설계회사였다. 경사시험 당일, 신성선박설계 직원은 미탑재물과 추가 탑재물들을 미리 측량해 표로 기록해 놓은 뒤 시험을 감독할 한국선급 검사원을 기다렸다. 오후에 한국선급 전종호 검사원이 도착했다. 그는 신성선박설계가 미리 작성한 미탑재물과 추가 탑재물 목록과 중량, 위치가 정확한지 검증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탱크 속 액체류에 대해 거의 확인하지 않고 경사시험을 진행시켰다. 참사 이후 그 검사원은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세월호는 정확한 무게중심 높이를 영원히 알 수 없는 배가 되어버렸다. 

화물과 승객을 더 싣기 위해 개조한 세월호는 결과적으로 화물은 덜 싣고 평형수를 더 실어야 하는 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은 제주까지 한번 왕복하는데 6천만 원 넘게 드는 배를 그렇게 운항할 수 없었다. 수익을 올리려면, 아니 적자라도 면하려면 승객보다 운임이 훨씬 비싼 화물을 최대한 빼곡하게 실어야 했다. 화물을 과적하면 배가 아래로 가라앉아 만재흘수선보다 깊이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건 불법이다. 그래서 평형수를 빼내서 만재흘수선을 맞췄다. 그렇게 하면 겉에서 보기엔 아무 문제 없는 배처럼 보였다. 하지만 밑바닥이 가벼워진 배는 늘 휘청이며 다닐 수밖에 없었고 선원들은 늘 불안에 떨었다.

▲ 강원식 1항사가 작성한 2013년 11월 29일 세월호 사고 보고서

결국 크고 작은 사고들이 속출했다. 2013년 11월 29일 제주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회도 부근 해상에서 4미터 짜리 파도를 맞고 배가 왼쪽으로 15도 기울었다. 화물칸 1층 컨테이너 위에 로프로 대충 묶어 올려둔 화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양주와 벽돌 등이 깨졌다.

2014년 3월 10일, 제주항에서 화물을 실은 지게차들이 뒷쪽 카램프로 들어가 우현 벽면을 따라 이동하자 배가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바깥쪽 승객용 계단이 부두에 부딪히며 찌그러졌다. 신보식 선장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세월호가 6825톤짜리 배인데 복원성이 오죽 나쁘면 지게차 몇 대 다닌다고 기울어졌겠느냐”고 말했다.

선사에 보고하지 않은 사고도 있었다. 참사 당일 승객들에게 ‘대기하라’는 방송을 반복했던 강혜성은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2013년 늦여름쯤 제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오는 도중 군산 부근에서 배가 오른쪽으로 20도 가까이 넘어졌고 힐링펌프를 돌려 30여 분만에 간신히 일으켜 세운 적이 있다”고 말했다.

신보식 선장은 배가 너무 불안하니 화물량을 줄여달라고 회사에 몇 차례 요청했다. 그러나 물류담당인 남호만 부장은 “화물을 많이 실으면 배가 가라앉아서 가니 더 안전한 게 아니냐”는 황당한 대답을 했다. 신 선장은 “그렇게 하면 복원성이 더 나빠지는 것”이라고 재차 말했지만 “화물을 많이 싣는 게 좋은 것”이라는 대답만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신보식 선장은 자구책을 만들어야 했다. 배가 기우는 걸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찾아내야 했다. 그래서 조타수들에겐 변침 구간에서 한번에 방향을 틀지 말고 미리부터 조금씩 여러 번으로 나눠서 타를 쓰라고 신신당부했다. 화물이 너무 많거나 기상이 좋지 않은 날엔 운항 도중 평형수를 조금 보충시켰다. 보통 파도가 높은 때에 펼쳐서 배의 좌우 요동을 줄여주는 핀안정기를 언제나 펴고 다니도록 했다. 폭이 좁고 조류가 센 맹골수도를 운항할 때는 반드시 조타실에서 직접 지휘했다. 어쩌면 그토록 복원력이 나빴던 세월호가 참사 이전 1년 1개월의 운항 기간 동안 대형 사고를 간신히 피할 수 있었던 이유였는지 모른다.

바뀐 선장, 늦은 출항, 깨져버린 '루틴'

2014년 4월 15일 인천항. 제주로 떠날 세월호에는 휴가를 떠난 신보식 선장 대신 정년 퇴직 후 촉탁직 계약을 맺은 교대선장 이준석이 승선할 예정이었다. 오전부터 실리기 시작한 화물들은 여느 때처럼 화물칸과 선수 갑판을 빼곡하게 채우고 출항을 기다렸다. 그러나 짙은 안개로 6시 반 정시 출항이 어려웠다. 시정주의보가 해제된 9시가 다 되어서야 세월호는 인천항을 떠났다.

▲ 6시 30분 정상 출항시 세월호 조타실 당직 순번
▲ 2014년 4월 15일 밤 9시 출항에 따른 조타실 당직 순번

그런데 출항 시간이 밀리면서 구간별 조타실 당직 순번이 틀어져 버렸다. 평소 조타실 당직은 3교대 체제로, 오전과 오후 모두 3시 반부터 7시반까지는 1항사 강원식과 1타수 박경남이, 7시반부터 11시 반까지는 2항사 김영호와 2타수 오용석이, 11시 반부터 3시 반까지는 3항사 박한결과 3타수 조준기가 당직을 섰다. 6시 반 정시 출항할 경우 수동조타가 필요한 인천항~팔미도 등대 구간과 맹골수도 구간은 경험이 많은 강원식-박경남 조가 당직이었다. 그러나 출항이 2시간 반 밀리면서 박한결-조준기 조가 수동조타 구간 당직을 맡게 됐다.

▲ 세월호의 타기장치 

세월호는 방향타를 돌려주는 유압 타기장치가 낡아서 효율이 좋지 못했는데, 그 때문에 다른 배들을 피해 움직어야 하는 인천과 제주 입출항 때에는 2대의 타기를 모두 가동시키고 먼 바다로 나가선 1대를 껐다. 평소 인천에서 정시에 출항하면 팔미도 등대를 조금 지날 무렵 신보식 선장은 직접 타기 1대를 껐다. 가끔 이준석 선장이 근무하는 날엔 그 구간의 당직인 강원식 1항사가 타기 1대를 껐다. 그러나 이날은 신보식 선장 대신 이준석 교대선장이 승선한데다 늦은 출항으로 당직 순번이 틀어져 타기 1대를 꺼야 할 사람은 박한결 3항사였다.   

밤 10시쯤 세월호는 박한결-조준기가 조타하면서 팔미도 등대를 조금 지나 운항 중이었다. 평소라면 이 구간을 강원식-박경남이 조타하며 7시 반쯤 지나고 있어야 했다. 또 이날 밤 10시쯤부터 옥상에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평소처럼 정시 출항했다면 태안 부근에서 불꽃을 쏘아올렸을 것이었다. 평소 불꽃놀이 때는 조타실 당직 항해사가 선장에게 운항 지휘를 맡기고 옥상에 올라가 불꽃놀이 행사를 지원했다. 불꽃놀이 중 안전사고에 대비하고 행사가 끝나면 잔불과 쓰레기 처리를 도왔다. 이날도 박한결 3항사는 이준석에게 조타실 지휘를 넘기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느라 타기 1대를 끌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결국 세월호는 타기 2대를 모두 가동시킨 채 계속 제주를 향해 운항하게 됐다.

조타장치 고장, 급선회, 급경사

다음날인 4월 16일 오전 8시 45분 세월호는 맹골수도를 통과하고 있었다. 박한결이 침로를 135도에서 140도로, 즉 우현 5도 변침을 지시했다. “아저씨, 140도요.” 조준기가 “140도, 써(Sir)!”라고 대답한 뒤 조타기를 돌렸다. 우현 5도, 중립, 우현 5도, 중립 순서로 서너 차례를 반복했다. 신보식 선장의 지시대로 ‘타를 나누어 쓴’ 것이다. 세월호의 뱃머리 방향은 1분에 걸쳐 우현으로 5도 선회한 뒤 직진했다.

그로부터 2분 뒤인 오전 8시 48분, 박한결이 다시 우현 5도 변침을 지시했다. “아저씨, 145도요.” 조준기는 조금 전과 똑같이 타를 나누어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뱃머리가 145도를 넘어 계속 돌아갔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조준기는 조타 핸들을 좌현으로 5도 틀었다. 그런데도 뱃머리는 점점 더 빨리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조준기는 “어, 어, 타가, 타가 안 돼!”라며 소리 질렀다.

▲ 세월호 선내 CCTV에 포착된 사고 직전 3층 로비의 모습

세월호가 오른쪽으로 급선회하며 왼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매점 진열대 물품이 쏟아져 내렸다. 대형 온수통이 쓰러지려 하자 승객들이 간신히 밀어 세웠다. 식당에선 공연용 장비들이 쓰러졌고 카페의 의자들이 왼쪽으로 밀려갔다. 로비 소파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일어서려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화물칸에서도 자동차와 중장비들이 왼쪽으로 밀리며 뒤엉켰다. 왼쪽 창문이 깨지며 해수가 들이쳤다. 세월호는 단번에 왼쪽 45.7도까지 기울어져 버렸다.

▲ 사고 당시 세월호 C갑판 화물칸의 차량 블랙박스에 포착된 모습

세월호가 쓰러진 과정과 경위를 볼 때 방향타가 급격히 돌아간 것만은 분명했다. 참사 이후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조타수 조준기의 조타 과실로 배가 쓰러졌다고 판단하고 기소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조타장치 고장 가능성도 있으니 인양 후 확인해야 한다며 조준기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밀은 선체를 인양해 조사하는 과정에서 풀렸다. 2018년 1월 세월호 선조위는 선체 타기실에 진입해 타기장치를 분리했다. 2월 5일부터 이틀간 조타장치 제조사인 일본 가와사키중공업 관계자와 영국 브룩스벨 관계자, 세월호 유가족 등이 입회한 가운데 분해 점검을 실시했다. 그 결과 2대의 타기 중 한 쪽에서 유압을 조절해 주는 솔레노이드 밸브의 철심이 유압을 차단하는 중립 위치에서 벗어나 한쪽으로 밀려 있는 상태임이 확인됐다. 가와사키중공업 관계자는 “운항 당시 이런 상태였다면 조타 불능에 빠지고 방향타는 오른쪽 끝까지 돌아갔을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조준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월호가 우현 급선회했던 이유가 드러난 것이다.

▲ 한쪽으로 밀린 채 발견된 조타장치 솔레노이드 밸브 철심

고장난 타기는 평소 제주에서 인천으로 올라갈 때 주로 쓰던 것이었다. 인천에서 제주로 갈 때는 2대를 모두 켜고 출발한 뒤 팔미도 등대를 조금 지나면 이 타기를 끄는 게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2대를 모두 켠 채로 계속 운항 중이었다. 만약 선장이 이준석이 아닌 신보식이었다면 팔미도를 지나 직접 껐을 것이었다. 만약 출항이 지연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 타기를 끄는 구간에서 불꽃놀이를 하지 않았다면 당직 항해사가 이 타기를 껐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적어도 그날 이 타기가 고장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랬다면 그날 세월호는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20년 된 낡은 타기는 머지 않아 고장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때 세월호는 분명히 쓰러졌을 것이다. 복원성이 너무나 불량한 비정상적인 배였기 때문이다. 

▲ 미국 미시시피강을 운항하던 플래그 갱고스호의 사고 당시 항적

실제로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으로 방향타가 통제되지 않으며 급선회하는 사고는 적잖이 발생한다. 세월호 참사 4개월 뒤인 2014년 8월 미국 미시시피 강을 운항하던 벌크선 플래그 갱고스호가 유조선과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조타수가 우현 15도로 방향을 꺾은 뒤 멈추려 했지만 뱃머리는 계속 돌아가 벌어진 사고였다. 하지만 플래그 갱고스호는 세월호처럼 쓰러지지는 않았다.

25년째 대형 원양어선 기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양 모 씨도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으로 배가 갑자기 돌아가는 사고를 3차례나 경험했다. 모두 60년 정도 된 외국의 낡은 선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배가 세월호처럼 쓰러져 버린 적은 없었다.

세월호도 복원력이 정상적인 배였다면 조타장치가 고장나 방향타가 끝까지 돌아간다고 해도 쓰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크게 원을 그리며 돌다가 엔진을 끄면 그 자리에 멈춰섰을 것이다. 그러나 세얼호는 급선회를 시작한 지 1분만에 쓰러졌고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왜 100분 만에 침몰했나

세월호는 오전 8시 49분경 단번에 좌현 45.7도까지 쓰러진 뒤 표류하다가 불과 100분 만에 침몰했다.  1시간 뒤인 8시 49분까지는 17도가 더 기울었지만 그로부터 35분 동안 65도가 더 기울어지며 침몰해 버렸다. 초기엔 어떤 틈새로 해수가 조금씩 흘러들어갔고 이후에 선체 내부를 해수가 급속하게 채워버렸다는 뜻이다. 세월호의 침수가 빨랐던 이유는 뭘까.

▲ 사고 후 시간별 세월호의 기울기

세월호의 가장 밑바닥 층은 연료와 청수, 평형수가 담긴 탱크들, 그리고 여러 기관 설비들이 설치된 구획들로 이뤄져 있다. 기관부의 각 구획들 사이에 있는 수밀문과 수밀맨홀은 운항할 때 반드시 닫아 놓어야 한다. 어느 한 구획이 침수되더라도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아야 배의 부력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 모두 열려 있었던 세월호 기관부 수밀문과 맨홀

그러나 인양된 선체를 조사한 결과 세월호 기관부의 모든 수밀문과 맨홀은 열려 있었다. 대부분 아예 닫을 수 없도록 고정해 놓은 상태였다. 선원들이 이동하기 편리하도록 해둔 것이다. 급속한 침몰의 가장 큰 이유였다.

▲ C갑판 통풍구로 침투한 해수의 확산 경로

세월호에 처음 해수가 침투한 곳은 C갑판, 즉 화물칸 2층 왼쪽의 통풍구였다. 선체가 좌현 45도로 기울면서 이 통풍구가 해수에 잠겼고, 통풍관이 연결된 바닥층 핀안정기실이 점점 해수로 채워졌다. 그리곤 열려 있던 수밀문과 맨홀을 통해 기관실과 보조기관실을 거쳐 타기실까지 모두 침수돼 버렸다. 

▲ C갑판 배수구로 해수가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

해수가 침투한 또 다른 경로는 배수구였다. 세월호의 각 갑판에는 선내에서 발생한 물을 배 밖으로 배출하는 배수구가 연결돼 있다. D갑판의 배수구는 수면과 가깝기 때문에 해수의 역류를 막는 스톰밸브가 설치돼 있지만, 수면보다 많이 높은 다른 갑판에는 이런 밸브가 없다. 세월호가 45도 이상 기울어 C갑판이 수면 아래로 내려간 순간부터 배수구를 통해 해수가 올라올 수 있었다. 

결국 C갑판 통풍관을 통해 흘러내려간 물이 기관부 전체를 침수시켰고, 배수구를 통해 역류한 물이 C갑판을 침수시키면서 세월호의 침몰 속도가 점점 빨라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모든 수밀문과 맨홀이 닫혀 있었다면 어땠을까.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의 모형 침수시험 결과 세월호는 65도에서 더 이상 기울지 않았다. 

세월호가 쓰러져 침몰하기 전까지 100분 동안 승객 구조에 나선 해경은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고, 그 결과 304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만약 세월호가 수밀문을 닫고 다닌 배였다면, 그래서 훨씬 더 오래 떠 있을 수 있었다면, 그토록 무능했던 해경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일관된 시나리오도 없는 잠수함설이 명맥을 유지한 과정

복원성이 지극히 취약했던 세월호가 조타장치 고장으로 급선회 끝에 쓰러져 침몰했다는 내인설의 일관된 설명과는 달리 이른바 세월호 잠수함 추돌설은 합리적 시나리오조차 정립했던 적이 없다.

▲ 2017년 4월 11일 목포신항만에 거치된 세월호 선체

2017년 3월 23일 선체가 인양되고 4월 11일 목포신항만에 거치됐다. 세간의 관심은 세월호가 외부 물체와 충돌한 흔적이 있는지에 쏠렸다. 그러나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9월 15일 뉴스타파가 세월호 화물칸에 실려 있던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입수해 보도했다. 한 블랙박스 영상 속에 G센서, 즉 차량의 충격을 감지해 표시해 주는 센서의 수치 데이터가 담겨 있었다. 분석 결과 화물칸 차량들이 왼쪽으로 밀리며 부딪치기 전까지는 어떤 충격도 감지되지 않았다. 잠수함이 세월호를 충격했다면 마땅히 일정 수치 이상이 나타나야 했다. 이렇게 잠수함설은 잦아드는 듯했다.

▲ 인양 과정에서 절단된 좌현 핀안정기
▲ 핀안정기 회전축의 과회전 모습

그러나 세월호 선조위 내 일부 그룹이 세월호 좌현 핀안정기 부분에서 이상 흔적이 발견됐다며 외력 가능성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좌현 핀안정기는 인양 과정에서 미리 절단한 상태였는데 회전축을 정밀 조사해 봤더니 최대 25도까지 돌아갈 수 있는 날개가 50.9도나 돌아간 흔적이 발견됐다는 게 그 근거였다. 그러니까 운항 중이던 세월호의 왼쪽 뒷편에서 잠수함이 다가와 핀안정기 부분과 추돌한 뒤 계속 밀고 감으로써 세월호를 오른쪽으로 급선회시켰다는 것이었다.

선조위의 핀안정기 담당 조사팀은 세월호가 침몰 후 해저면에 닿을 때 돌출된 핀안정기가 토양에 박히는 과정에서 과도하게 돌아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그러나 외력 그룹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선조위는 2018년 4월 13일 전원위원회에서 외력검증TF를 출범시켜 잠수함 충돌설을 공식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 장범선 위원이 외력검증TF 잠수함 핀안정기 추돌 시나리오를 기각한 이유

그러나 이른바 ‘잠수함 핀안정기 추돌설’은 금방 기각됐다. 외력검증TF 구성원이었던 장범선 조사위원(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이 내부 보고서를 통해 ‘불가능한 시나리오’라고 반박한 것이다. 세월호의 좌현 핀안정기를 잠수함이 후방 추돌하면 선체를 우현으로 선회시키는 힘을 가할 수는 있지만, 이때 세월호의 속력이 빨라질 수밖에 없는데 AIS 항적에 나타난 세월호 속력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또한 잠수함이 세월호의 좌현 아랫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선체의 횡경사를 줄여주어야 하는데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 나타났듯 횡경사 속도는 계속 빨라졌기 때문에 역시 모순이라는 것이었다.

▲ 마린이 외력 모형시험에 앞서 계산한 핀안정기 최대 외력 크기

그럼에도 외력검증TF는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에 외력을 적용한 모형항주시험을 의뢰했다. 그러나 이때도 시험을 시작도 하기 전에 반론에 부딪혔다. 마린은 모형선의 좌현 핀안정기에 최대 얼마의 힘을 가하는 시험을 모델링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사전 계산 작업을 수행했다. 직진하던 세월호를 AIS 항적대로 선회시키려면 좌현 핀안정기에는 선체 진행 방향으로는 2만 6천 톤, 선체에 수직 방향으로는 23만 톤의 힘이 걸려야 했다. 그러나 핀안정기의 제원을 분석한 결과, 260톤 이상의 힘만으로도 굽거나 부러져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핀안정기가 파손되지 않고 날개만 돌아가게 하면서 세월호 선체를 오른쪽으로 급선회시킬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마린은 최종 보고서에 “세월호 급선회에 외력을 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 시나리오”라고 적었다.

▲ 좌현 핀안정기실 주변 외판의 균열 모습

이렇게 핀안정기 추돌 시나리오가 난관에 부딪히자 외력 그룹은 다른 시나리오를 꺼내들었다. 좌현 핀안정기실 부근의 선체 외판에 있는 균열과 핀안정기 내부의 변형이 잠수함 추돌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외력TF를 이끌던 권영빈 제1소위원장은 선조위 활동 종료일을 불과 5일 앞둔 2018년 8월 1일 이 주장을 목포MBC 기자에게 전했고, 목포MBC는 별다른 검증도 없이 곧바로 이 주장을 크게 보도했다. 

그러자 이틀 뒤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내인설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던 조사위원들은 강하게 비판했다. 이미 10개월 전에 조사를 마친 핀안정기실의 변형에 대해 전혀 엉뚱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핀안정기 추돌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자 다른 시나리오를 들고 외력 의혹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선조위는 사흘 뒤 활동을 종료했다. 선조위 외력검증TF의 외력 주장은 ‘열린안’이라는 이름으로 종합보고서에 남겨지고 말았다.

선조위에 이어 출범한 사참위는 핀안정기와 좌현 외판의 손상이 모두 잠수함 추돌의 결과물이라고 전제하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온갖 용역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미 선조위 시절 외력TF가 시도했던 조사들을 재탕한 수준이었다. 2021년 11월, 사참위는 좌현 핀안정기와 외판 손상에 대한 용역 결과를 대한조선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했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심지어 선조위 열린안에 서명했던 장범선 교수는 “이제 외력 가능성은 낮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라며 사참위의 조사 방식과 관점을 강하게 질타했다.

▲ 사참위의 잠수함 추돌설 최종 시나리오

그래도 사참위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새로운 시나리오를 꺼내들었다. 세월호가 처음엔 조타 과실 때문에 급선회하며 18도까지 기울었다가 다시 복원되는 중이었는데 이 시점에 잠수함이 추돌해서 더 기울게 만들었다는 시나리오를 짜냈다. 그러니까 잠수함 추돌이 급선회를 만든게 아니라 급격한 횡경사의 원인이 됐다는 주장이었다. 

▲ 사참위의 용역으로 실시된 잠수함 추돌 3D 시뮬레이션

사참위는 이 시나리오의 합리성을 보여주겠다며 잠수함이 어느 방향에서 어떤 속도로 추돌하면 좌현 핀안정기와 선체 외판을 손상시키면서 선체도 더 기울게 할 수 있는지를 3차원 시뮬레이션 작업으로 찾아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한국해양대 이상갑 명예교수의 용역 시뮬레이션 결과, 잠수함의 추돌 속도와 각도, 방향 등을 어떻게 조합해도 실제 좌현 핀안정기의 회전과 외판 손상, 그리고 선체 횡경사 속도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사참위는 똑같은 시나리오로 네덜란드 마린에도 외력 모형시험까지 의뢰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린은 최종 보고서에서 “세월호의 과도한 횡경사는 외력을 도입할 필요 없이 선체 내부적 요인에 의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고 밝혔다.

세월호 선체가 인양될 것인지조차 불투명했던 참사 초기엔 침몰 원인을 두고 잠수함을 의심할 여지도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인양된 선체를 직접 조사한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 나왔을 땐 의심을 거둬야 했다. 그럼에도 국가조사기구인 사참위는 일관된 시나리오조차 없는 잠수함 추돌설에 3년 반이나 매달렸다. 그 과정에서 잠수함설은 사실상 기각됐지만, 사참위는 공식적으로 기각을 선언하지도 않은 채 활동을 마쳤다. 사참위의 이런 모습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대한 우리 공동체의 관심을 오히려 멀어지게 만든 건 아니었는지, 냉정한 평가를 남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세월호의 10배 넘는 배가 쓰러진 이유

2019년 11월 9일, 미국 동부 조지아주 연안의 브런즈윅항을 출항해 협수로를 통과하던 현대글로비스 소속 골든레이호가 좌현으로 전도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골든레이호는 세월호의 10배가 넘는 7만톤 급 자동차 운반선이었다. 선주국인 한국과 연안국인 미국, 기국인 마샬 제도가 1년여 동안 공동 조사를 벌인 결과 사고 원인은 복원성 불량 상태에서의 급격한 선회였다. 골든레이호는 브런즈윅항으로 입항할 때 수심 제한 때문에 평형수 1천 3백 톤을 배출한 뒤 하역 작업을 마치고 다시 출항할 때 바뀐 복원성 상태를 점검하지 않았다. 복원성은 입항 때보다 훨씬 좋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마주오는 선박을 피하기 위해 큰 각도로 우현 조타를 했다. 그 결과 세월호와 똑같이 좌현으로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방향타를 돌린 것이 기계고장인지 선원의 조타인지만 달랐을 뿐 복원성이 불량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세월호와 판박이인 사고였다.

▲ 사고 직후의 골든레이호

그러나 사고에 따른 인명 피해의 결과는 달랐다. 세월호는 478명 가운데 304명이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진 반면, 골든레이호에 타고 있던 27명의 선원은 전원 구조됐다. 차이는 기관부의 수밀문 개방 여부였다. 세월호와 달리 골든레이호는 기관부 수밀문들 가운데 2개만을 개방해 놓은 상태였다. 처음 왼쪽으로 기울면서 열려있던 도선사 출입문으로 해수가 들어갔고 이후 기관실과 타기실이 침수됐지만 그 이외의 구역으로는 해수가 침투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부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사이 구조작업을 벌여 41시간 만에 모든 선원들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 사고 41시간 만에 모두 구조된 골든레이호 선원들

또 다른 차이가 있었다. 사고 조사 결과에 대한 수용 여부다. 7만 톤급 초대형 선박이 맥없이 쓰러진 사고가 발생하자 일부 언론에서는 좌초나 충돌 가능성을 보도했다. 넘어진 선체의 바닥에 약간의 긁힌 흔적이 있었다는 점이 그 근거였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마샬제도 등 3개국의 공동 조사 결과가 나오자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선조위 외력검증TF가 네덜란드 마린과 영국 브룩스벨 등 해외 전문기관의 조사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끝까지 잠수함설을 밀어붙였던 것과 대조된다.

합리적인 세월호 침몰 원인 서사의 사회적 공인을 위하여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 깊이 조사하거나 연구해온 전문가들은 사실상 이미 5년 전 선조위 내인설 보고서로 세월호 침몰 원인은 대부분 설명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참사 당시의 온전한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는 내용은 불가피하게 남겨질 수밖에 없는데, 잠수함설 등 외력설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자신의 가설도 일정한 합리성을 가진다는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는 재난과 참사 조사의 근본적 한계를 전혀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 등의 노력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복원된 참사에 속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100%를 재현해야 재난 조사가 성과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세월호 참사 조사의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재난 조사는 증거가 유실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기억이 빠르게 왜곡되기 때문에 100%를 재현한다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오히려 세월호 침몰 원인에 관한 조사는 이 정도로 재현한 것도 굉장히 큰 노력을 통한 성과였다고 봅니다.
- 박상은 / 전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 저자)

이와 함께 내인설은 참사의 직접 피해자인 유가족들에게 정서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가 유가족들에 대한 폭력적 대응과 사찰, 노골적인 조사 방해, 인양에 대한 부정적 입장 등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면서 유가족들은 반드시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고 싶어했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누적된 구조적 문제들이 복원성을 악화시킨 상태에서 조타장치 고장이 방아쇠가 됐다는 내인설의 설명은 유가족들에게는 정부 책임을 면제해 주는 서사로 받아들여졌다. 그와 달리 잠수함설은 정부 윗선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서사로 여겨졌기에 시나리오의 일관성이 없음에도 공론장에서 퇴출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땐 감정 자체가 잘 추스러지지 않았어요. 내 아들이 죽었는데 그게 정말 사소한 이유 때문인 것 같은 거예요. 과적, 고박 불량, 불법 증개축, 그에 따른 복원성 불량, 또 선원들이 타를 어떻게 썼는지를 모르겠지만 타가 갑자기 돌아갔고... 내 새끼가 죽었는데 이런 사소한 이유들 때문에 죽었나, 이걸 인정을 하기가 쉽지 않죠. 오히려 어떤 커다란 음모가 있고 거기에 희생됐다고 생각하는 게 부모들은 마음이, 뭐랄까, 애들한테 좀 덜 미안하다고나 할까요.
- 장훈 / 416안전사회연구소 소장 (고 장준형 군 아버지)

그러나 실제로는 세월호 침몰에 대한 내인설의 설명 속에는 기업과 국가의 책임이라는 요소가 대단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 직접 조사했던 선조위가 유가족들에게 이를 제대로 설명하고 설득해 내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세월호의 참사의 전사(pre-history)에서 중요한 점은, 예를 들어 불법 증개축이라든가 불법 한국선급의 승인이라든가 '불법'을 붙이기는 굉장히 어렵지만 이게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선사가 지킬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는 점이에요. 사실 이걸 총체적으로 보면 국가가 그냥 문서로만 어떤 규제를 해놨지 실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이윤 추구하는 이 행위들을, 안전을 희생을 시키고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들을 통제를 했냐라고 하면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게 굉장히 여러 국면에서 계속해서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 있어서 국가 책임을 굉장히 강하게 물을 수가 있죠. 그 선사가 잘못한 것이 오로지 선사만의 책임이 아니라 사실 이걸 관리감독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 있는 것이죠.
- 박상은 / 전 세월호 특조위 조사관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 저자)

고 장준형 군의 아버지인 장훈 416안전사회연구소 소장은 이제는 전문가 집단과 언론이 더 이상 유가족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합리적 설명과 설득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월호는 해상에서 사고가 났을 때는 아무도 안 죽었어요. 근데 이게 사고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참사로 번져버린 거죠. 모든 참사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요. 그런데 가족들은 인정을 못 하겠죠. 쉽게 수긍 못할 거예요. 난리를 칠 거예요. 이런 사소한 것들 때문에 우리 애들이 죽었다고? 이런 부분들을 전문가 그룹과 언론이 설득해내는 것도 사회적인 책임이라고 생각을 해요. 피하지만 말고요.
- 장훈 / 416안전사회연구소 소장 (고 장준형 군 아버지)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는 참사는 너무나 큰 비극이지만 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은 더 큰 비극이다. 세월호 참사 9주기. 이제는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세월호 침몰 원인 서사를 확립하고 안전한 사회로 가기 위한 과제들을 풀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때다. 

뉴스타파 김성수 sskim@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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