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의 공존 이야기 [서상혁 수의사의 동물과 사회]
편집자주
동물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수의사이자 동물병원 그룹을 이끄는 경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물과 사람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해 지금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한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달 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이 5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지키며 누적 관객 수 430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신카이 마코토가 제작한 '스즈메의 문단속'은 감독의 지난 작품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와 함께 재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불립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앞선 두 작품과 다른 점이라면 가상의 재난이 아닌 실제 재난을 다뤘다는 점입니다. 바로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 지진의 안전지대에 속해 있었고, 지진의 공포를 직접 체험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작품 속 감정에 얼마나 동화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영화가 집중한 것은 재난의 물리적 극복이 아닌 상처받은 감정의 치유였습니다.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극복하려면 문을 열어 상처와 마주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난 경험이 필요하진 않아 보입니다. 그것이 꼭 동일본대지진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겐 쉬이 여닫기 힘든 상처의 문 하나쯤은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수의사의 직업병일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출연한 고양이 한 마리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영화 속 고양이 이름은 다이진. 대지진을 일으키는 불가사의한 힘인 미미즈를 막는 무생물의 요석(要石· 카나메이시·지진을 잠잠하게 하는 영험한 힘이 있다고 믿어지는 돌)입니다. 다이진은 주인공 스즈메에 의해 우연히 재앙을 막는 돌에서 고양이로 풀려났다가, 다시 무생물의 요석으로 돌아갑니다.
영화에서 다이진은 대재앙을 막기 위해 인간 대신 요석으로 돌아가길 자처합니다. 얼핏 숭고해 보이는 다이진의 선택에서 진한 슬픔이 느껴졌습니다. 요석으로 돌아가기로 한 선택이 온전히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지 납득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극 중에서 다이진은 요석에서 풀려난 후 되찾은 생의 환희를 영화 내내 천연덕스럽게 드러냅니다. 인간인 스즈메와 소타가 품은 생의 순결한 의지를 고양이 다이진 역시 똑같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이진은 인간을 대신해 생명의 삶 대신 요석의 역할을 받아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오랫동안 인간은 동물에게 의지해 왔습니다. 가뭄이나 태풍, 지진 같은 극복하기 힘든 재난을 맞닥뜨렸을 때면 더 그랬습니다. 특정 동물을 추앙하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지만, 신의 노여움을 푼다는 미명하에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극복하는 희망의 표상이자, 책임을 물어야 하는 대상으로 동물을 이용해 왔습니다.
요석으로 돌아간 다이진에게 느껴진 슬픔의 정체는, 인간에 의해 이유 없이 희생된 수많은 동물의 슬픔이 겹친 탓일 겁니다. 네,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현실에선 되레 집사가 된 인간이 고양이를 모시고 살고 있지 않으냐? 반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도 인간에게 위기가 닥치면, 동물은 너무나 간단히 희생되곤 합니다.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가축전염병이 퍼졌을 때, 수십만 마리의 동물을 살처분하는 모습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광경입니다.
작품이 다룬 동일본대지진만 해도 1만5,000여 명의 사람이 희생됐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동물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간신히 참사를 피한 사람들과 함께 살던 동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재난이 일어나는 일본에서조차 동일본대지진 이전까지는 피난 시설에 동물의 동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이진은 결국 스즈메의 아이가 되지 못했어.' 남자 주인공 소타를 대신해 요석으로 돌아가며 다이진이 읊조린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언제든 동물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재난 상황이 아닌 평소에라도 동물과 사람이 동일한 생명체로 존중받길 기대해 봅니다.
서상혁 아이엠디티 대표이사·VIP동물의료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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