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유명무실` 公기관 노동이사제 폐지론
시행 8개월째 '3분의 1'만 선임
졸속추진으로 실효성마저 의문
문재인 정부가 대표적인 친노조 정책으로 추진한 노동이사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제도 시행 8개월이 지났지만 노동이사를 선임한 곳이 대상 공기업의 3분의 1에 그칠 정도로 힘이 빠졌다.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과 함께 노동이사가 근로자와 이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지만 특별한 보상이 없고 근로자와 경영진 사이에 낀 경계인으로 정체성 혼란까지 겪고 있어서다. 일부 공기업에서는 선뜻 나서는 적임자가 없어 애를 먹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도입을 약속했지만 졸속 추진에 따른 부작용과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만큼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알리오),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지난달 초까지 노동이사 선임 의무 공공기관 87곳 중 노동이사 선임을 마친 곳은 한국전력거래소,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남동발전, 한국남부발전, 한국마사회,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등 32곳(36.7%)에 그쳤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노동이사를 임명해야 하는 공공기관 규모도 축소됐다. 정부는 지난해 8월 노동이사제 시행 2주만에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통해 공기업·준정부기관 분류기준을 상향 조정했고 43개 기관이 기타공공기관으로 변경돼 대상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노동이사제 대상 기관은 130개에서 87곳으로 줄었다.
노동이사제는 근로자가 선출한 대표자가 이사회에 참석해 회계, 인사, 감사 등 주요 안건에 대해 발언하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등 경영에 참여하는 제도로 도입 때부터 논란이 적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기업의 혁신을 저해하고 외국인이 투자를 기피해 주주이익을 침해할 것"이라는 경제계의 우려에도 이를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노동이사는 노조의 경영개입 창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시행령에 따르면 과반수 노조가 있는 경우 노조 대표가 2명 이내의 후보자를 임원추천위원회에 추천할 수 있다. 대상 공기업 87곳 대부분이 과반노조를 갖고 있어 사실상 노조가 노동이사를 선출하게 된다. "민감한 경영 사항이 유출돼 경영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리스크가 상존한다"(공기업 관계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조가 추천한 노동이사가 정당한 노동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이사를 선임한 일부 공공기관에서도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노동이사는 평소에는 직속 상사와 경영진의 업무지시를 받는 노동자로 일하다 이사회 의결사항이 있을 때 이사로 참여하는 이중적 정체성으로 현업과 이사 활동 모두에 어려움을 겪는 역기능이 크다는 것이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노조가 노동이사를 선출해도 노조와 노동이사 활동 기간과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근로자를 대표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며 "노사 양측으로부터 고립되는 상황이 빈번하다"고 전했다. 다른 관계자는 "업무와 병행해 이사 활동까지 겸하다 보면 두 일을 모두 놓치는 경우가 생긴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일이 가중되는 노동이사에게 월급을 더 주려면 예산 문제도 생기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며 "일을 더 하면서 특별한 보상이 없으니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지난 정부에서 주도한 정책이 이번 정부에서 제대로 시행될 것인가라는 우려는 있다"며 "이사회 활동 등은 회의록 공개가 어렵기 때문에 활동 내역도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정부가 사기업까지 노동이사제 확대 가능성을 열어뒀으나 경제계에서는 공기업과 지배 구조 등 성격이 다른 부분을 고려하면 적용이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노동이사제에 대해 "해외에서도 기업의 혁신 저해, 외국인 투자 기피, 이사회 의사 결정 지연, 주주 이익 침해 등 이유로 비판이 많은 제도"라고 비판한 바 있다. 박 교수는 "한국 기업들은 경영자와 일반 주주의 이해 상충보다 소액주주와 대주주의 이해 상충이 더 크다"며 "해외와 달리 한국에서 노동이사가 이런 문제를 중재할 수 있는 해결책이 되기 어렵고 다른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더 낫다"고 지적했다.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는 각 기관별 이사들 임기가 달라 노동이사제 도입 6개월이 지나도 노동이사 선임 시기가 각각 달라지고 있으나 점진적으로 추진 중이며 아직 제도 도입 초기인 만큼 신중하게 연착륙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제도 정착을 위해 전문가들을 불러서 교육도 하고 지자체 사례들도 소개했다"며 "기관과 노동자 대표 간에 합의가 된 사안에 대해 정부가 늑장을 부릴 수도 없고 충분히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타 공공기관이 늘어난 것은 해당 기관의 특수성을 고려해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노동이사 선임 제외와 관계없이 더 좋은 방향으로 가는 의도"라며 "임명이 느리다고 판단하기 보다는 경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뽑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석준기자 mp1256@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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