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쉬는 바람에
[크리틱]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각국의 영문학자들이 주인공인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 <교수들>(1984)에는, 셰익스피어의 첫 일본어 번역의 희한한 제목들을 부끄러워하는 일본인 번역가가 나온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이 <정욕, 덧없는 세상의 꿈>(春情浮世の夢)이 된 것에 영국인이 감탄하자, 신이 난 일본인은 기억나는 것을 더 읊어 준다. <줄리어스 시저>는 <예리한 자유의 검>, <베니스의 상인>은 <인육인질 재판>으로 등등.
코믹하지만 참 복잡한 생각이 드는 장면인데, 그 일본인의 불안감이 너무 친숙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서양고전 상당수가 제목부터 잘못된 번역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우리는 주기적으로 접한다. 존 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1963)도 그런 지목의 대상인데, 제목을 <현업에 복귀한 스파이>로 해야 옳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 이에 대한 찬반 논의를 보지 못했으므로 한번 다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올해는 마침 이 소설이 출간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위대함은 보통 자기가 깨닫지 못할 때 달성된다. 경력 3년차 스파이 소설가 르카레에게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추운 나라>)의 의미는, 드디어 팔리는 책, 직장에서 해방시켜 준 기특한 책이었다. 이 책이 영미 양쪽의 추리소설상을 휩쓸고, 50년 뒤에 역대 최고상(대거 오브 대거스)을 받고, 20세기의 대표 소설 중 하나로 추앙받게 된 것은 분명 그의 예상 범위를 넘어서는 사태였다.
이 소설 제목에서 문제가 되는 건 콜드(cold)이다. 콜드에는 여러 뜻이 있다. 춥다, 차갑다 말고도 은퇴했다, 현업에서 떠났다는 뜻도 있고, 길을 잃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도 있다. ‘워밍업’할 때 그 웜(warm)의 반대편 의미로 말이다. 이런 용법은 컴퓨터를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켜는 ‘콜드 부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어가 중의적이더라도 번역은 선택해야만 한다. <추운 나라>는 콜드의 가장 익숙한 뜻, ‘춥다’를 택한 번역이다. 이는 이 소설이 냉전의 절정기에 등장했다는 시간적 맥락을 부여한다. 반공주의적인 제목이 아니었다는 점도 덧붙이는 게 좋겠다. 주인공의 이동경로를 보면 ‘추운 나라’가 꼭 공산국가를 뜻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점에서 <추운 나라>라는 지리적 비유는 혼란스러운 것일 수 있고, 직업적 상황에 집중한 <현업에 복귀한 스파이>라는 해석이 더 안정적일지 모른다. 더 좋다는 건 아니다. 지금에 와서 ‘추운 나라’를 제목에서 떼어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냉전시대의 대표 소설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걷어차는 꼴이기 때문이다. 제목의 매력 면에서도 <현업 복귀>는 <추운 나라>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실 소설 제목 같지가 않다.
그러나 그 이상함 때문에 우리는 묻게 된다. 복귀한 게 왜 중요한가? 핵심은 주인공 리머스의 마지막 행위가 훈련된 조직원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잠깐 쉬느라 몸이 굳었고, 정신이 해이해졌다. 아직 이 책을 접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더는 줄거리를 언급하지 않겠다. 이 책은 인간이 공백기를 갖는다는 것, 정신이 해이해진다는 것에 얼마나 중대한 의미가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가 계속 조직에 있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웠을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잠깐 인간으로 돌아온 뒤 그건 불가능한 일이 된다. 르카레는 말한다. 인간은 뜻하지 않게 서툴러진다고. 그런데 그건 결함이라기보다 안전장치인 것이다.
아마 우리는 의식적으로도 서툴고 생경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이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직에도 필요한 일이다. 숙련자와 동조자에만 익숙한 조직은 이미 병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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